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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窓(창)] 여전히 중요한 “마르크스”

 

“정곡을 찌르다”는 본질의 핵심을 꿰뚫었다는 말인 건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정곡은 무슨 뜻일까? 바를 “정(正)”자에 물새인 고니를 뜻하는 “곡(鵠)”자가 합쳐진 단어다. 그러면 왜 난데없이 고니인가?

 

화살을 쏠 때 과녁의 한 복판이 정곡이다. 활을 바르게 잡고 날아가는 새도 맞춘다는 실력이 여기에 담겨 있다. 그래서 그곳에는 고니 모양의 가죽을 붙였다고 한다. 조선실학의 거장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남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적혀 있는 “정곡(正鵠)”의 유래다.

 

자기의 저서를 “사설(僿說)”이라고 한 까닭은 또 무얼까? “사(僿)”가 잘게 쪼개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저 소소하게 잡문을 모아놓은 정도라고 겸손히 부른 데서 나온 이름이다. 하지만 이 책은 고증을 기반으로 백과사전처럼 천문학과 지리, 역사와 시, 천주교와 서양과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박물학적 지식을 담고 있다.

 

- 성호 이익의 실득지학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가 주자학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질문을 통해 점검하고 실제적인 삶을 위해 유용한 지식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경세(經世)의 길을 열고자 했다. 지식과 학문이 실천의 힘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실득지학(實得之學)”의 세계다.

 

그렇다면 여기서 실(實)은 무엇인가? “실학(實學)이 뭐냐?” 라고 물으면 흔히들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답한다. 식민지 교육의 잔재가 이리도 깊다. 실이 무언가라는 질문은 허(虛)가 무엇인가와 짝한다.

 

이는 당대의 주자학이 권력화되고 민생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논쟁에만 빠져 있는 것에 대한 분노와 맞닿아 있다. 주자(朱子)의 시대에나 통용되는 예(禮)를 여전히 정통이라 여기고 궁내의 상복(喪服)이 어쩌니 저쩌니 하는 식의 논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공부도 암기로 줄줄 외우는 걸로 과거에 급제하는 풍토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었다. 입증도 하지 않고 주장하고 옛것이나 중국 것이면 다 좋다고 붙들고 있는 것에 대한 일격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실”은 변혁이다. 허의 세계를 뒤집고 실의 세계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체적인 역사의식이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마련이니,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고치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며 ‘변법(變法)사상’을 내세운다. 그저 도구적으로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변혁에 기초한 실제적 지식과 실천적 학문을 지향했던 것이다. 실용적이라는 답은 이런 크기와 무게를 왜소화시키는 관점이다.

 

 

 

율곡 이이, 《지봉유설(芝峯類說)》의 이수광 등에서 싹이 터 비롯된 이런 생각은 유형원(1622~1673)에 이르면 《반계수록(磻溪隧錄)》에 담긴 ‘시무책(時務策)’이라고 불리는 정치경제학이 체계화된다. 토지의 공유제도 중요한 정책제안이었으며 이 전제(田制)를 바로잡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문란하게 된다고 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관통하는 주장이다.

 

유형원을 거쳐 성호 이익에 이른 실학은 결국 굽이굽이 흘러 마침내 정약용(1762~1836)으로 집대성된다. 이들 남인(南人)계 지식인과는 별도로 홍대용-박지원-박제가로 이어지는 북학파(北學派)가 실학의 또 하나의 기둥이다. 이들이 읽기를 즐겼던 책이 이익의 저작들이었으니 성호파와 북학파는 서로 내적으로 깊게 이어져 있다.

 

- 역사의식의 정곡을 찌르다

 

거기서 내려와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1807~1876)를 매개로 다음 역사로 연결된 것이 다름 아닌 개화파 김옥균(1851~1894) 등이었으니 이들이 봉건체제를 혁파하고 인민 평등사상으로 나가면서 조선혁명의 시발점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17~18세기에 씨앗이 뿌려진 실학은 그렇게 세월이 지나 역사의식의 변혁사에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이런 의식과 의지가 민중의 힘과 만나 동학을 비롯해 의병과 독립투쟁으로 뻗어나간 물길은 민주화 투쟁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역사의 대하(大河)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흐름이 운동사의 기억을 넘어 하나의 지적 전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느새 박제된 지식이 되었으며 “변혁”이라는 줄기찬 동력과 한 몸이 되어 혁명의 지식, 학문으로 진화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조선의열단의 약산 김원봉조차 이 땅에서 아직도 독립투쟁사에 명확히 기록되지 못하고 있고 그가 꾸린 당이 “조선혁명당”이며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바로 이 조선혁명당의 선언을 쓴 사실도 교육과정에서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조선혁명의 목표를 이족통치(異族統治), 특권계급, 경제약탈제도, 사회적 불평등 및 노예적 문화사상을 타파하는 것에 둔 것도 우리 사회의 역사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목표들 모두 우리에게 여전히 절실하며, 이족통치조차 사실상 아직 제대로 끝나지 않았다.

 

1949년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무너뜨린 친일세력이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면서 그 장대한 역사의 대하를 기억에서 하나하나 지워버렸다. 이 과정에서 토지제도의 전격적인 변혁은 물론이고 혁명을 위한 일체의 학문은 그 어떤 것이든 지적 시민권을 박탈하고 멸종시키는데 온갖 물리적, 제도적, 사상적 탄압의 수단을 총동원해왔다.

 

이런 지배세력의 지적 폭행에 마르크스의 학문을 금지시키는 일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이익이 유학만이 허용되었던 시절에 마테오 릿치의 《천주실의》를 연구하고 서학에 대한 조예를 깊게 했던 시절보다 더 후퇴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체제가 작동하는 원리와 그 모순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일상의 교육적 상식이 되는 것은 마땅하다.

 

봉건시대에 ‘전제(田制)’라고 불리는 토지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는가가 정곡을 찌르는 일이 되는 것처럼 자본주의에서 자본의 문제를 파헤치는 것이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일이 된다. 그런데 아예 과녁 자체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마르크스는 이 나라의 지적 탐구의 대상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왔다.

 

- 마르크스를 읽지 말라는 사회

 

 

그가 쓴 저작을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시절이 얼마나 길었는가. 그로써 이 나라의 학문은 지독한 지적 빈곤의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영향력과 그 논쟁의 역사 속에서 풍부하게 발전해온 서구의 지적 체계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지구적 자본주의의 지배에 대한 깊은 분석과 진단, 그리고 실천의 방향과 내용까지 담아내고 있다.

 

 

《자본론》 강의가 고 김수행 선생이 서울대에서 했던 이래 사라졌고, 《자본론》은 이제 더는 법의 족쇄에 묶이지 않고 버젓이 팔리게 되었지만 마르크스 연구와 교육은 본격화되지 못하고 있다.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라는 것은 알지만 마르크스가 태어난 날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적다. 1818년에 출생, 1883년까지 격렬한 삶을 살아낸 그의 혁명적 사유는 그야말로 넓고 깊기가 한이 없다.

 

마르크스는 그 체계가 방대하기 짝이 없고 논리가 치밀한 헤겔 철학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 사변적 경계를 뛰어넘어 현실의 고통과 그 구조의 핵심으로 들어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변혁적 실학의 세계를 뚫어나갔다. 그런 작업의 성과를 외면하고 산다는 것은 기성의 질서를 그대로 용인하면서 어디까지나 그 한계 안에서 때로 불평이나 토하면서 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적인 사회가 지닌 부(富)는 상품의 막대한 축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자본론》의 첫 문장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Wealth of the Nation)》이 국가의 부가 아니라 국민의 부를 의미하고 모두를 잘 살게 하는 시장의 원리를 밝혀냈다고 한다면, 마르크스는 그 시장의 내면에 장착된 모순을 파고 들었다. 그런데 이 첫 문장은 그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비판적으로 해부해나갈 것인지를 선언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생산력이 높아져 전에는 생산할 수 없었던 상품이 쏟아져나오고 이로 해서 그 사회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풍족해진다면 그것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논리에 대한 정면 반박이다. “드러낸다”라는 표현은 그렇게 보이지만 본질은 따로 있다, 라는 말이다. 현상에 가려진 베일 뒤의 현실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품이 풍부하게 생산되니까 부하게 되었다고 여길 수 있지만 그 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정작 그 부의 직접 생산자는 어떤 지경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좋다, 좋다하면 되는 걸까? 라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착취와 빈곤의 다른 축에 부의 축적이 있다면 이를 어찌 받아들일 것인가?

 

- 우리가 얻을 것은

 

그러니 한 마디로 속지 말라는 거다. 여기서 자본이라는 말은 단지 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관계의 총체”를 뜻한다. 여기서 그 사회를 움직이는 “명령체계”가 작동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드러나지 않는 본질적인 권력이다. 특권의 카르텔이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치를 비롯해 마르크스로부터 이어지는 지적 계보는 찬란하기 그지 없다. C.L.R. 제임스 등에 이르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과 제3세계의 관계에 대한 통찰의 원천은 무궁무진해진다. 토지의 소유구조 문제, 지대의 변혁에서 자본주의의 지배양식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본질적 점검을 하는 노력은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무수한 모순과 고통을 해결하는데 절박한 필수현안이다.

 

마르크스만 빼고 시작하는 방식은 과녁이 없는 화살쏘기가 된다.

 

《프랑스 대혁명사》를 쓴 크로포트킨은 다음과 같이 혁명의 요체를 정리한다. “인민으로부터 나오는 혁명적 행동과 지식인들의 혁명적 사상이 하나의 몸이 되는 것.” 혁명을 포기하고 사유를 시작하는 지식인에게서 인민은 허학(虛學)만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민 자신이 혁명적 지식인이 되면 된다.

 

잃을 것은 족쇄요, 얻을 것은 “새로운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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