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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을 가다 52 - 주민들의 의지로 일궈낸 진촌(3)리 사곶(沙串) 이야기

 

 

 사곶(沙串)에는 세계에서 두 곳만 존재한다는 천연비행장이자 해수욕장(천연기념물 제391호), 먹거리인 냉면과 칼국수 등 관광자원이 즐비하다. 주민의 갱생 의지로 외로움과 가난을 극복하고 일궈낸 촌락이다.

 

2021년 1월 기준 142세대 297명이 거주하며, 규모는 작지만 육지에 알려진 유명세로는 대도시 격이다. 사곶은 어떤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을까?

 

▶ 지명 유래

 

사곶 마을은 백령도 남동쪽 끝 부분의 해안지대로 용기포 서쪽에 있다. 북쪽은 남산(해발 145m)이 솟아있고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살쿠지’, ‘사을곶’ 등으로 불려왔으며 한자로는 ‘沙乙串地’, ‘沙串地洞’, ‘沙串洞’ 등으로 표기돼 왔다.

 

모두 모래땅 또는 모래땅이 송곳같이 길고 뾰족하게 된 곳이라는 뜻이다. 즉 이 모래땅이 안골뿌리에서 서쪽 끝 사북까지 길게 뻗어나갔다 해 그 같은 지명이 붙게 된 것이다.

 

▶ 입도조 김해김씨 김두기(金斗己)와 마을 형성

 

사곶에 최초로 들어와 모래땅을 개척한 입도조(入島祖)는 김해김씨 김두기로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이며, 적어도 1753년 이전 즉 18세기 전반기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 해적의 출몰이 잦아지면서 정부가 백령도에 군사시설인 수군진을 설치하고 주민들을 대거 입도시켜 해양 방어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한 데 따른 것이다.

 

그후 이 가문은 일부 가족원들이 대대로 수군진과 향촌사회에서 주요 관직을 맡으면서 번창, 현재까지 백령도에서 최대 일가를 이루고 있다. 적어도 지금부터 270년 이전 김해김씨 정착 이후 점차 광산김씨, 청풍김씨, 원주변씨, 밀양손씨 등이 뒤를 이어 마을이 이뤄졌다.

 

100년 이전의 가구수는 원래 터를 잡고 살던 약 40가구 주민과 6·25 이후 50가구의 초도(椒島) 피란민이 유입돼 구호양곡으로 연명했으며, 마을이 간척사업과 모래밭 개간사업으로 농사개량이 이뤄지면서 1960년대 보리고개가 사라졌다.

 

▶ 사곶 먹거리 변천사

 

거의 흙을 찾아 볼 수 없었던 사곶 모래땅에 연명을 위한 곡식은 무엇이었을까? 김해김씨 일족들은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만하다는 막연한 자신감과 의지를 갖고 정착했다. 그들은 모래땅에 주곡이던 피(稷)나 기장을 경작해 오다가 흙이 조금 있는 땅에는 조를 심었다.

 

피보다는 조가 사곶에서 귀한 농작물이었던 셈이다. 피범벅으로 끼니를 잇는 상황은 광복 후까지 오랜 기간 이어졌고, 1960년대 작부(作付, 경작) 체계가 바뀌면서 피나 조 대신 밭벼(陸稻)를 재배한 뒤 삶이 펴지기 시작했다. 이후 솔개지구 간척과 함께 논농사를 경작했다.

 

지금도 밭벼는 꾸준히 재배하고 있지만 경작 면적은 점차 감소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의 특산물로는 땅콩, 양파가 유명하며 대파·무·배추 등 농작물은 군납을 통해 농가 소득에 일조하고 있다. 최근에는 석류 농가도 있어 향후 귀추가 주목된다.

 

▶ 사곶 천연비행장 겸 해수욕장(沙濱) 그리고 해송 방사방풍림(防沙防風林)

 

사곶 해변은 천연비행장이며 썰물 때는 길이 3㎞, 폭 200m의 백사장이 드러나는 사빈 겸 해수욕장이다. 언뜻 보면 평범한 모래밭처럼 보이지만 그저 흔한 모래가 아니다. 이 백사장은 매우 고운 규암 가루가 쌓여 다져진 것인데, 입자간의 공극(孔隙)이 작기 때문에 다짐작용이 매우 커 천연비행장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까지 C-130 수송기가 하루 1~2회 뜨고 내렸다고 전한다. 특히 사곶이 백령도의 북서쪽이 아닌 남동쪽에 있기 때문에 규암 가루가 주변으로부터 공급돼 퇴적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췄던 것이다.

 

최근 모 공군부대에서 비행장으로서 기능을 실태 조사한 결과 작년까지 합격 판정을 받았다고 하나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상태에서 둑을 허물고 역간척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또 썰물 때에는 경사가 거의 없는 평탄한 백사장으로, 무공해·무사고의 해수욕장으로 백령주민 뿐만 아니라 관광객도 많이 찾는다.

 

그러나 모래사장이 현지 주민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천혜의 조건도 있었지만 모래바람 때문에 겪은 생활 고통도 만만치 않다. 가는 모래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집 문턱까지 불어와 쌓인다. 바람이 부는대로 날려 두둑이 되거나 파져서 깊은 웅덩이가 되기도 했다.

 

이 고충을 해결하고자 사곶초등학교 김상희(1965년 부임) 초대 교장이 주변에 해송 숲 건설을 구상하고 묘목을 심은 것이 방사방풍림의 시초가 됐다. 학생들과 함께 종자를 모아 학교림 재배지역을 임대해 묘목을 재배한 끝에 성공했다.

 

마침내 1971년 4만 그루를 옹진군에 처음 판매하기 시작, 매년 10만 그루 이상을 팔아 자활학교의 기틀을 다지고 방사방풍의 역할은 물론 모래땅도 옥토로 변했다. 지금의 사곶 해변가에 길게 늘어선 소나무들 수령은 적어도 50~60년이다. 솔밭 모래밭에는 잔디를 심어 모래 유출과 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젠 잡초만 무성한 채 잔디의 흔적은 멧뿌리 새마을 노래에만 남게 됐다.

▶ 사곶의 종교와 교육

 

사곶에는 사곶교회와 공소가 있다. 사곶교회는 중화동교회에서 분립해 1905년 9월 15일 초가 3칸의 예배당을 마련하면서 시작됐다. 117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백령도의 두 번째 교회다. 1900년대 초 김영희, 김잔돌, 김장립, 안중기, 김흥준, 김윤광, 김창길 등 여러 명이 사곶과 모교회인 중화동교회를 왕래하며 쌓은 돈독한 신앙심이 사곶교회 건립 배경이 됐다.

 

이후 발전을 거듭하며 1913년에는 예배당을 6칸으로 증축했고, 다시 1938년 ‘장연 덕골’에서 건축자재를 가져다 12칸으로 확장을 이어갔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대에는 예배당을 징발해 일제가 군수물자를 만드는 공간으로 사용하려 할 때 김흥준이 중심이 돼 강력하게 제지하기도 했다.

 

교회 종도 떼어간 것을 알고 김병준 장로와 김흥준 성도가 다시 찾아오기도 해 역사적으로 질곡의 세월을 겪기도 했다. 2001년에는 성전을 현대식으로 새로 건축하고, 2005년에는 100주년 기념 예배 및 성전 봉헌식을 거행했다. 사곶공소는 1960년대 건립됐고 50여 명의 신자가 미사를 거행하고 있다.

 

사곶초등학교는 1961년 사곶분실로 시작해 1963년 국민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은 이래 학생 수의 증가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점차 감소, 1998년 2월 28일 백령초등학교로 통폐합됐다. 마을 단위의 학교가 존재했었다는 점으로 보아 사곶의 교육열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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