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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4>-최만린의 예술세계

 

한국 ‘추상 조각’의 새 지평을 열다

며칠 전에 경북 울주군 태화강 상류에 있는 반구대 암각화가 주요 방송국의 메인 뉴스로 다루어졌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암각화로서 너비가 무려 8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암벽이며, 돌고래와 각종 물고기 및 호랑이 표범 등의 여러 동물들이 자유자재로 쪼아져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암각화가 연중 반 이상의 기간 동안 물에 잠겨서 훼손 상태가 심각하다는 내용이었다.

 

신석기시대에서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조각되었을 것으로 간주되는 이 암각화는 이처럼 오랜 세월을 물에 잠기면서도 여전히 생명력을 지닌 미적 존재로서 이제는 우리 현대인의 마음을 달래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하여 많은 사람에게 삶의 희망과 아름다움을 느끼게끔 해주는 미적인 존재를 창조하는 예술가들은 남다른 세계를 넘나드는 이들이다. 쓰레기통에 있는 보잘 것 없는 물건들도 예술가의 눈에 선택되어 그의 손길로 조금만 다듬고 만지작거리면 전혀 다른 이미지를 지닌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된다.

 

이렇듯 작가들은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경험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도록 해주는 특별한 매개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비록 선사시대에 만들어지긴 했지만, 우리가 도무지 갈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미지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가는 길을 몇몇 사람들의 손길과 마음으로 열어 놓은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예술은 가시적인 것에서 벗어남을 통해서 탄생되고 비로소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술에 있어서의 생명력은 갈수록 메말라만 가는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와 안위를 줄 수 있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대표 격인 최만린 역시 생명의 근원을 토대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쳐 많은 사람들에게 감흥과 신선함을 주는 작가이다. 그의 예술가적인 강점은 무엇보다도 가식이나 수식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천성적으로 서구의 여느 유명한 대가들처럼 고차원적인 이념이나 예술론으로 무장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자신이 체험했던 삶의 직관을 통해 무심하게 생명성을 관조(觀照)하기를 즐긴데서 태어난다.

“이렇게 말하면 나 자신을 꾸미는 것 같아 싫기도 하지만, 내가 예술을 하는 것은 명예나 외향적인 것보다도 ‘중이 목탁을 두드리는 거나, 내가 흙을 만지는 거나 같은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하는 거지요.” 중이 목탁을 두드리는 마음이나 조각가가 흙을 만지는 심정은 어떠할까. ‘사람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생명의 근원은 흙에 있는 것이다.

 

순수 그 자체가 생명의 근원이라 할 만큼 최만린의 예술세계에는 그 어떠한 사상도 이념도 녹아있지 않아 보인다. 사람이 흙에서 나온 것처럼 최만린의 예술 또한 아무 조건도 가식도 없이 자연스럽고 순수하다. 마치 투박한 반구대 암각화에서 삶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흙처럼 아무 가식이 없는 조각의 세계를 구축한 최만린은 실제로 그의 삶에서도 꾸밈없이 순수함을 보여준다. 이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마냥 순진한 면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최만린은 누구보다도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면서도 세상에 대한 욕심이 없다. 그가 경기중학교를 다녔을 즈음에는 서울대에 진학하여 외교관이나 정치가가 되는 당찬 꿈을 가졌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했던 경기중학교 6학년 무렵인 고등학생 때에 6.25를 겪으면서부터는 사람에 대한 실망과 상실감 등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이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것이다. 그 때문에 아무리 정신적으로 고차원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될 수 없었다.

최만린은 순수한 동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일 정도로 아픔이 매우 컸다. 마음과 모든 생각이 황폐할 무렵에 그는 서울대에서 조각을 공부하기로 맘먹었다.

“당시 나는 현실을 떠나고 싶었어요. 현실을 떠나서 할 수 있는 것이 조각과 같은 예술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 조각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 밖의 것이라서 출세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었어요. 굶어 죽기 딱 알맞은 게 조각이었을 거예요. 아마 나의 젊은 시절에 전쟁이 없었더라면 정치인이나 경제인이 되어있겠죠.”

최만린은 본래 그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세상이 잘못되어 가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리 민족사의 비극인 6.25로 인해 꿈 많고 정의감에 불타던 한 총명한 소년은 세상과 아무 관계없는 무욕무심의 예술가적인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최만린의 모습은, 중국 송(宋) 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죄 없는 많은 서민들이 원나라의 군사들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자 본혈세계(本穴世界)라는 글을 쓰고 평생을 송나라 황실 쪽을 바라보며 생활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리다 생을 마친 정사초(鄭思肖)를 떠올리게 한다.

 

 

 


정사초가 군자의 향기를 가졌다는 난(蘭) 그림을 그릴 때는 뿌리를 그리지 않았는데, 이는 인간적인 향기가 없는 사람을 뿌리가 없는 난에 빗댄 것이었다. 최만린이 정사초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작품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수식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흙은 흙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무욕무심의 마음만이 그의 예술세계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훌륭한 예술에는 곧 취미판단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좋은 예술을 하려면 취미로 하는 것과 같이 욕심 없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취미는 의도나 의식 혹은 부담을 지우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최만린의 작품세계는 취미 그 이상이란 생각이 든다. 그의 예술적 심성은 취미의 선상을 벗어난 무공해와도 같은 ‘그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미켈란젤로의 가슴에 대고 미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가슴에 대고 미의 소리를 들어야 해요”

최만린의 작품세계는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함축하고 있다. 작가는 어떤 대상이나 사물에 대해 집착하기보다는 그 원형적 본성을 찾기 위해 오히려 욕심 없이 모든 것을 버리는 작업으로 일관한다. 마치 스님이 본질을 깨우치기 위해 고행을 하듯이 말이다. 자신의 내면과 삶의 깊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성숙된 생명력이 그의 작품의 세계가 될 것이다. 그의 예술은 낮고 겸손함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솔직함에서 비롯되었기에 거기에선 언어적 혹은 표현적 과대 포장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자유롭다.

이처럼 자유로움을 지닌 최만린이지만 서울대 교수 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늘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녔을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하였다. 제자들에게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었다는 그는 강단에 섰을 때는 작가이기 이전에 철저한 교육자였다. 그는 인품이 깨끗하여 화단에서 신사로 통하며, 입으로만 말하지 않고 항상 행동이 뒤따른다.

그는 자신의 작업 세계가 버림의 세계인 것 같다고 표현하면서도 아무래도 너무 고차원적인 이야기가 되었다고 쑥스러워 하며 자신은 그렇게 고차원적인 인간이 못된다고 말한다. 그 누군가가 자신의 작품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심정으로 보아준다면 고맙게 생각된다고도 말한다. 경기중학교 재학 시절에 조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신 스승 박승구(朴勝龜)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으며, 현실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조각을 선택했다는 작가의 순수한 모습에서 또 다른 예술적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스스로 정직해야 한다’는 최만린의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예술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는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글=장준석(미술평론가)

약 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졸업
미국 PrattInstitute대학 연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역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역임

수 상
1965 제4회 파리비엔날레
1967 제5회 파리비엔날레
1969 제10회 상파울로비엔날레
1971 인도트리엔날레
1981 한독미술전, 서독 쾌니히미술관
1986 86‘ 아시아 현대미술전
1988 세계현대미술제
1996 fiac 96‘ 파리프랑스국립현대 미술관 관장 역임
1991 김세중조각상 수상
1994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수상
1997 대한민국 환경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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