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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9>-이왈종 의 예술세계

 

유유자적하는 시인처럼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 대로… 거침이 없는 화가다.

마흔 다섯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홀홀단신 제주도로 낙향 무념무상을 맛보고 사형취형(捨形取形)의 세계가 그림 속에서 조화를 이뤘다.

 

기교를 넘어선… 순수·노련美의 하모니

“언제 이왈종 선생님 뵙게 제주도에 한번 가야죠.” “네 조만간에 가죠.” 두어 달 전부터 계속 그림을 촬영해 온 유 선생, 그리고 이제는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을 갖춘 조 선생 등과 그림이 좋아 컬렉션을 하던 중에 나눈 막연한 대화이다.

 

 

 

열대성 나무들이 풍족하게 자랄 수 있는 제주도에서 이왈종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바쁜 일상인지라 맘먹은 대로 쉬 되지 않고 날짜만 지나갔었는데 드디어 이루어지게 돼서 약간은 설레었다. ‘이왈종이 누구인가! 유유자적하는 시인처럼 마음 가는 대로 붓 가는대로 거리낌 없이 그리는 화가가 아닌가! 그림에 대한 관심의 유무를 막론하고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그림…….’ 나른함 속에 몸을 맡긴 비행기 안에서 내 머릿속은 온통 이왈종을 떠올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으로, 그림에서만 보아왔던 그의 작업실 앞에 어느덧 서 있었다. 멋진 제주의 바다가 한 눈에 쏙 들어오는 참한 경관이 맘에 들었다. 편해 보이는 작업실에 들어서자, 조금은 귀염성이 있고 사람냄새 나는 그림들이 시선을 끌었다.

차 한 잔으로 여정의 피로가 풀어진다 싶을 즈음, 이왈종은 먼 길을 온 우리 일행을 위해 기꺼이 붓을 들어주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꼭 한번 직접 보고 싶었던 터 이었다. 제주의 바람이 산들거릴 것 같은 한적한 방에서, 한 쌍의 남녀가 뜨겁게 달아올라 성교를 하는 에로틱한 내용을 그는 스스럼없이 차분하게 그렸다. 막힘없이 술술 풀어지는 붓놀림에도 놀랐지만, 알몸뚱이의 아녀자와, 그녀에게 에로틱하게 달라붙은 발가벗은 남자의 모습 등이 의외로 천박하지 않고 흥미로웠다. 그의 그림은 간단하면서도 간단치 않게 여겨지도록 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들었다.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께서 지금 그리시는 것과 같은 작품이 이번에 K옥션 경매에서 이백 만원에 낙찰된 건 알고 계신지요?” 옆에서 꼼짝도 않고 지켜보던 조 선생이 꽤나 궁금했나보다. “네 알고는 있어요. 만남의 인연으로 도판 앞부분에 그려준 건데, 그게 찢겨서 팔린다는 게 좀…….”

 

 

 

재작년이던가,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할 때 작가는 자신의 화집을 소장하려는 사람들에게 앞부분에 간단한 컷을 한 점씩 기념으로 그려주었다. 작가가 아끼는 자식과도 같은 귀중한 화집이 잘려서 미술품 경매로 나와 환전이 됐으니 아마 조금은 배반감도 있었으리라. 낭만과 풍류를 지닌 노 화가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왈종의 화집에 그려진 그림엔 작가의 순수함이 깃들어있다. 돈 몇 푼 만지기 위해, 도록에서 찢겨 나온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경매한다는 건 생각해 볼 부분이다. 화랑은 그림을 파는 상점과 같은 곳이긴 하지만, 본연의 자세와 역할뿐만 아니라 사명감도 반드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또한 몇몇 젊은 작가의 그림을 팔아 돈 몇 푼 챙기려고 유망한 화가나 중견 작가들의 이미지에 흠집을 내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답답함을 뒤로 하고 인근 생선 횟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변의 자연 풍광이 예사롭지 않았다. 손바닥만한 전복은 참으로 훌륭한 안주거리였다. 제주 바다의 모든 것을 맛보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이왈종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무르익어갔다. 서울에서 교수이자 화가로서 명성을 쌓고 잘나가던 이왈종이 마흔 다섯의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제주도로 낙향하였다. 그는 아무의 눈치도 안 보며,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싶은 대로, 실컷 그림이나 그려보고 싶었다. 그를 아끼던 많은 지인들의 걱정 어린 만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왈종이 처음 제주도에 와서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는 적응이 잘 안 돼서 붓이 잡히질 않았어요. 참을 수 없을 만큼 서울 생각이 나서 붓을 다 꺾어버렸어요.” 사랑하는 가족도 지금껏 해 오던 그림도 모두 자신과 함께 있지 않았다. 외로움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이들을 놔두고 혼자 제주로 내려 올 때 정말 마음이 저렸다.

너무 많은 잡념으로 도무지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이왈종은 육체적 노동이 온전하게 들어가는 작업으로 작품의 방향을 바꿔버렸다. 제주에서 부조도 하고 골판지를 썰기도 하며 땀을 쏟아내는 작업들이 시작되었다. 서울에서의 모든 것을 잊어버릴 만큼 정신없는 작업이 그에게는 꼭 필요했다. 이름 모를 풀 한포기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잡초 무성한 한적한 길은 그야말로 무념무상을 맛보기에 최적이었다. “속상할 때 잡초만 봐 보세요. 무질서한 것 같지만 질서가 있어요. 나무도 마찬가지예요. 서로 침범을 하지 않아요.”

 

 

그는 대상을 관찰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연과 하나가 되고 있었다. 집으로 찾아드는 이름 모를 새들이 정겹게 느껴지고, 그들의 노래가 마음으로 스며들게 되었다. 재미있는 그림들이 자연스럽게 탄생되었다. 집은 집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새는 새대로, 이왈종은 이왈종대로, 한 공간 안에서 조화롭게 숨을 쉬고 있었다. 질퍽하게 색을 풀어 붓 가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그리면 기교적인 것을 넘어선 순박미와 노련미가 어우러졌다. 이제 형태는 더욱 느슨해졌지만 그 이미지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를 버리니 오히려 진짜 형상이 드러난 것이다. 사형취형(捨形取形)의 세계가 그림 속에서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이왈종의 작업실에서 보면 나무들이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고, 먼 데 바다에서는 배들이 출렁거린다. 나지막한 담을 사이에 두고, 안에서는 밖이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이고, 밖에서는 집안이 한 장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는 이처럼 그림 같은 풍광과 매일 조우하면서 온종일 그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쉼 없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진짜 세상인지, 세상이 진짜 그림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이왈종은 어제도 오늘도 그림 그리기만을 한다. /글=장준석(미술평론가)

*약 력

중앙대학교 회화과 졸업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졸업
추계예술대학교 교수 역임

*수 상

제 23회 국전 문화공보부 장관상
제 2회 미술기자상
한국미술작가상
제 5회 월전미술상
*저서 / 화집
《생활속에서- 중도의 세계 이왈종의 회화》
미술통신 작가총서 제 4집, 미술통신, 1990,서울
《See, Wal Jong 이왈종》
Art Vivant, 시공사, 1995, 서울
《도가와 왈종》
이병희 글, 이왈종 그림, 솔과 학, 1993, 서울
《Lee Wal Jong》Yon Art Publishing, 2005, 서울

*전 시

《개인전 19회》
2005 갤러리 현대
2002 몽쎄라(Montserrit)갤러리
미국, 뉴욕, 맨허튼 갤러리
2001 조선일보 미술관 , 서울
2000 가나아트센터, 서울
1997 가나화랑
가나보브르화랑, 프랑스,파리
1994 수목화랑, 서울
한성화랑, 서울
1991 청작미술관, 서울
1990 동산방화랑, 서울
1985 동산방화랑, 서울
1983 신세계미술관, 서울
1981 한국화랑, 뉴욕
오시타시엔화랑, 독일 퀠른
1980 미도파화랑, 서울
1976 미도파화랑, 서울
1971 국립공보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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