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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앎’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보인다

근대학문 방법론 익숙 자신도 모르게 편향성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면 아는것부터 해체해야

 

벼르던 붓글씨 쓰기를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지 이제 반 십년이 된다. 그 중 지난 일년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였으니 겨우 입문 단계에 들어섰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글씨 쓰는 것이 은근히 좋다. 왜 그럴까 하고 가끔 생각해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으레 신월동 지하 서실에 다니던 처음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근대 학문 방법론에 익숙한 우리들은 대부분 ‘아는 만큼 보인다’고 누군가 그랬듯이 어떤 체계적인 앎의 틀이 제시될 것으로 은근히 기대하고 그 문을 두드렸었다. 범위와 방법을 필두로 하여 각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아니더라도 그 어떤 틀이 있겠거니 했던 것이다. 또 나의 경우는 서당식 한문 공부를 한 경험에다가 지나치던 동네 서실에서 본 열심히 베껴 쓰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래 무조건 집어넣는 수밖에 없어’라면서 바짝 마음을 다잡고 있던 터였다.

막상 선생님의 교수법은 너무 단순하여 허탈할 지경이었다. 줄긋기도 그렇게 보여주는 둥 마는 둥 하시고 마구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번은 간단한 강의. 글씨는 사람이라는 것. 사람의 일생이 그렇듯 시작과 끝이 중요하니 붓끝이 드러나지 않게 잘 숨기라는 것. 또 꺾어지는 고비에서는 한 번씩 가다듬고 쉬어가라는 것. 꾸밀려고 붓을 구부리지 말고 곧 바로 세워 어리숙하게 쓰라는 것. 붓의 끝은 획의 중간에 두라는 것.

그렇게 시작된 글씨쓰기는 전서, 예서를 주로 한 정향선생님의 서첩을 모사하는 것으로 넘어갔는데, 이 단계에서도 여전히 가르침의 요체는 ‘똑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쓰는 것’이었다. 평소에 선생님의 독특한 서체를 ‘흠모’하고 있던 우리는 가끔 ‘처음처럼’ 등을 흉내 내어 몰래 써 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 선생님의 질책은 혹독한 것이었다. “세상에 자기를 따라 하는 자를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이후 해서, 행서로 넘어가면서 구양순, 안진경, 왕희지 등의 서첩을 소개하면서도 따라 쓰기를 결코 강요하지 않으셨다. “너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쓰다보면 그 필요성을 느끼는 날이 올 것이다. 폰트는 많이 개발할수록 좋다. 필요한 순간순간 바로바로 활용할 수 있게.” 남의 말을 잘 믿기로 소문난 나는 정말 신이 났었다. 게다가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마구 휘두르라시는데 못 할 게 어디 있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만히 지켜보던 선생님이 드디어 제동을 걸고 나오셨다. “저 녀석이 어디 가서 한 10년 썼다고 거짓말 할 거야.” “이놈아 어리숙하게 쓰라고 그런다고 속까지 어리숙하면 어떡해! 넌 어디 가서 나한테 배웠다고 그러지마.”

그렇게 2년 남짓을 지나 선생님은 때 이른 하산명령을 내리셨다. 벼루며 붓이며 먹이며 종이를 주섬주섬 싸들고 집 쫓겨난 거지처럼 문을 나서며 우리들은 저 속세에서 빌어먹을 곳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고도 지금 나는 붓 쥐는 일을 그리 부지런히 하지 못하지만, 그 즐거움과 의미는 세월이 가면서 더 커져가는 것을 느낀다.

그 즐거움의 비밀이 무엇인지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하였었다. 막연히 구속이 아닌 어떤 자유로움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 거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선생님의 강의안 중 ‘아는 것과 보는 것의 싸움’이란 글을 읽고 한 발 더 다가간 듯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세상은 편견으로 가득 찬 텍스트이며, 우리가 안다는 것은 ‘편향되게 보는 것’이라는 것. 편향되게 보는 것에서 있는 대로 보는 것에 이르려면, 아는 것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 마치 산꼭대기에 우뚝 선 낙랑장송 한 그루가 속세를 훤히 다 알아 잘 보는 것 같지만 고고한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본다는 것. 오히려 무지한 빗방울 하나하나가 골짜기 골짜기를 흘러 온갖 쓰레기들을 쓸어 담고, 웅덩이가 있으면 메우고, 폭포가 있으면 뛰어 내려, 들판과 마을을 지나며 모든 더러운 것을 끌어안고, 마침내 가장 낮고, 넓고, 깊은 바다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삐딱하게 보는 ‘앎’을 벗어버리고, 제대로 보는 자기의 참여 지점을 갖게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앎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그 바다에 서서 이제야 명아주, 강아지풀, 진달래,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등이 더불어 사는 숲을 절로 ‘보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진정한 콘텍스트로서의 ‘앎’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다시 보는 만큼 알게 되나니, 그때 아는 것은 예전 같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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