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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10>-권옥연의 예술세계

 

제가 여인을 그릴 때 과거 나와 관련된 여인들을 연상한다거나 혹은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없어요.
그리다 보면 상상 속의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지요…
저는 스케일이 큰 화가가 못 돼요. 저는 큰 작품을 잘 안 해요. 그림이 커지면 거짓말을 하게 돼요.
그림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투명한 슬픔 담은 ‘청회색 빛’의 소녀, 세상을 홀리다

 

필자는 네 살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으므로 미술과의 인연이 40여 년을 넘었다. 그간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어찌되었든 미술이 천직이거니 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 동안 많은 그림과 많은 작가들을 만나왔다. 필자가 만나 본 화가들 중에 작고하신 분이 벌써 여럿인 걸 보면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생존하는 작가 중에서 그 작품이 좋은 느낌을 지속적으로 주는 작가를 손에 꼽아본 적이 있다. 그 몇 안 되는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권옥연이었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여러 정황이나 인품 그리고 예술세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오로지 작품만을 본 순수한 나의 주관적 취향이다. 칸트가 그의 ‘판단력비판’에서 ‘미는 순전히 주관적’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이나 혹은 도록에서 권옥연의 작품을 보게 되면 유난히 더 눈길이 가곤 했다. 특히 그의 청회색 톤의 소녀의 그림은 순박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상념에 젖은 듯했다. 다소곳한 표정과 분위기 때문인지 감성이 풍부한 그 그림이 나의 마음을 끌었다. 이처럼 유난히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힘은 무엇일까. 혹시 사춘기 시절에 짝사랑했던 한 여학생을 못내 그리워하며 그렸을까. 온갖 생각 속에 어느덧 작가의 작업실에 이르렀다. 올해로 여든 다섯의 성상(星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차분하면서도 막힘이 없는 말솜씨가 놀라웠다. 작가와 마주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세대의 벽은 허물어졌고, 작가의 그림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의 화가로서의 첫 출발은 평범하지 않다. 그림을 좋아해서 화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권옥연의 경우는 자신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화가가 된 특이한 경우이다. 조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그림을 그리게 된 화가 권옥연. “그림이 좋아서 그렸다기보다는 그림을 잘 그린다고 알려지면서 떠밀리듯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지요. 화가에게 잘 그린다는 표현은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몇 년 전 동아일보에 글을 연재했던 한 지방대학 교수는 권옥연의 <타월을 든 여인(릴리안)>을 보면서 25년간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았다고 동아일보에 기재한 적이 있었다.

“사랑이 거기 있었다. 25년의 시간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내 곁을 떠났으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시간도 점령하지 못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앞에 홀연 등장했던 그녀, ‘릴리안’의 우수마저 신비롭던, 투명한 슬픔을 담은 청초하고 이국적인 소녀. 고등학생은 청회색이 자아내는 묘한 분위기에 그저 매료됐다. 사춘기의 정신적 허기를 아직도 감당할 수 없을 때, 권옥연의 ‘릴리안’은 그렇게 나의 혼을 앗아갔다. 그녀를 소유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팠던 나는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났다…. 퇴폐적 사랑, 그리움으로 병드는 영혼이 오히려 아름답던 시절, 은은한 청회색을 배경으로 우수에 젖은 권옥연의 여성은 잔인한 매력으로 나를 혼절시켰다….”

 

그의 <타월을 든 여인(릴리안)>은 대단히 섬세하면서도 알 수 없는 서정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마치 한 잔의 포도주를 마셔가며 조금은 슬픈 상념에 잠긴 것처럼 말이다. “제가 여인을 그릴 때 과거 나와 관련된 여인들을 연상한다거나 혹은 아련한 추억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없어요. 그리다 보면 상상 속의 한 여성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지요. 눈을 그릴 때는 동지섣달이라도 진땀이 납니다. 얼굴을 그린다면 마주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얼굴을 그려야 하지요.”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의 대가들은 눈을 그리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눈에 눈동자를 찍는 것을 아도(阿堵)라고 하는데, 그림으로 도(道)를 구현시키는 궁극점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위진 시대에 장승요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수 일에 걸쳐 안락사(安樂寺)라는 절에 네 마리의 용을 그렸는데, 장승요가 용 그림에 눈을 찍지 않자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눈동자를 그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그가 두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렸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일며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그 만큼 눈동자를 그리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권옥연의 그림 솜씨는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어느 날 그가 표구를 하러 명동의 유일했던 미술 재료상에 갔더니 주인인 하다까와상이 “이 그림 네가 그린 거냐?” 라고 물으며 놀라워하였다. 한번은 작가가 중학교 때 선전에 출품을 하게 되었다. 예심에서 특선을 하였음에도 중학생이란 이유 때문에 입선으로 바뀐 적이 있었다. 이 무렵 유일하게 미술평론을 하던 길진섭씨가 당시 잡지였던 ‘조광’에 권옥연의 그림을 극찬하는 글을 싣게 되었다. 권옥연은 감사하는 마음에 수소문하여 당시 길진섭의 부인이 운영하던 ‘전원’이라는 카페를 찾아갔다. 일 미터 구십 정도 되는 건장한 체격의 길진섭이 한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조광에 글을 잘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중학생이냐?” 길진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학생이 선전에 입선하였을 것으로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평론가 김종근은 자신의 평론집에서 권옥연을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이자 멋쟁이 화가이며 휴머니스트라고 말했다. 권옥연은 함흥의 명문 권진사 집안의 오대독자로서 다섯 살 때부터 서예를 익혔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예술적인 감흥을 체험하였다. 이와 유관한 듯 권옥연의 그림은 마치 은은한 음률이 흐르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고 느낌이 풍부하다.

또한 권옥연은 마음이 여리고 진실하다. 몇 해 전인가 파리 근교에 있는 고흐의 무덤 앞에서 그는 눈물을 글썽였다. 일생을 그림에 바친 불행했던 고흐의 무덤에 아무 것도 없이 온 자신을 자책하면서 안타까운 나머지 흐르는 눈물이었다.

 

이처럼 감수성이 풍부하고 진실한 권옥연의 작품세계에는 휴머니즘이 흐른다. 향수를 자아내는 그의 작품은 한국인의 정서가 물씬 풍기며 인간미가 돋보인다. 게다가 작품 속의 형상과 색채는 가히 환상적이라 할 만큼 깊이가 있고 정감이 흐른다. 이는 권옥연의 고운 심성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의 예술적 스케일은 크고 다양하여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앞에서 감동을 받고 건물 기둥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내 다시는 그림을 그리는가 봐라. 내가 뭐 화가라고….”

권옥연은 가끔씩 미케란젤로의 감동을 생각하며 자신의 한계를 생각해보곤 하였다. “저는 스케일이 큰 화가가 못 돼요. 저는 큰 작품을 잘 안 해요. 그림이 커지면 거짓말을 하게 돼요. 그림 앞에서 거짓말을 하면 안 돼요.” 이처럼 겸손하고도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림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것은 당연한 것 같다. /글=장준석(미술평론가)

[약력]
동경제국미술학교 졸업
프랑스 파리 아카데미 뒤훼 졸업
국전초대작가 국전심사위원
금곡박물관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수상]
대한민국예술원상(86)
보관문화훈장(90)
3·1 문화상(94)
최우수작가상(97)
경복대상(2000)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1)
’98공로 예술인상

[활동]
파리, 살롱 도똔느전 출품(57~58)
파리, 레알리떼 누베 초대 출품(59)
파리, 슈레아리즘전 출품(60)
상파울로 국제전 출품(65)
일본 EXPO 70 세계 100인전 초대 출품(70)
현역 화가 100인전 출품(국립현대미술관, 73)
한·불 수교 100주년 PARIS전 초대
MANIF Seoul 95초대 개인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및 소극장 面幕제작(77)
한불 수교 100주년 프랑스전 초대 출품(86)
국제 교류전 (프랑스, 이태리, 독일, 영국, 99)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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