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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조의 희말라야 여행기<12>

5천550m, 거만한 雪山에 도전하다!-‘칼라파타르’ 등정기

 

* 칼라파타르에 서서- 산이 망각을 만든다.

 

살갗에 닿는 냉기가 섬뜩하다. 아무래도 어제 먹은 알약(고산병에 좋다던 약) 때문인지 손발이 저리고, 거의 감각이 없다. 동상이란 생각도 들고 추위도 앞서 느끼던 것과는 달리 발끝에서 뼛속까지 스민다.

 

칼라파타르(5천550m)가 만만한 게 아니네. 고도 400미터를 더 올라간다는 게 이렇게 힘들 수 있을까. 바닥에 주저앉아 두 팔을 짚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왜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걸까. 인정머리라곤 찾을 수 없는 퍽퍽한 땅을 걸음마다 쉬어가며 올랐다. 걷다가 멈추고 기다가 멈추었다.

 

버텨야지, 몸이 자꾸 땅을 향해 처진다. 무릎을 짚고 다시 일어나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다. 왜 이렇게 먼 걸까.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아 질질 끌다가 고개를 들고 돌아 섰다.

사방으로 펼쳐진 설산, 빙하 너머 하얀 설벽 뒤에 선 검은 봉우리가 에베레스트다. 8천 미터급 고봉들이 나를 향해 둥글게 섰다. 저 아래 군데군데 청록의 빙하호가 아니라면 흑백사진 속이다.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선 봉우리를 보면서 뼛속이 시린 추위도 잠시 잊는다. 여기도 저기도 그 너머도 모두가 설산, 고봉이다.

 

눈에 반사된 빛에 눈이 부시고 따갑다. 햇살이 바로 위에서 콕콕 찔러댄다. 그래도 해 뜨기 전 보단 낫다. 앞 뒤 뒤집어가며 볕에 쪼이니 몸도 조금 따뜻해진다. 뜨거운 물을 마시며 잠시 앉았다. 귓불이 얼어 산이 떠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윙윙거리는 소리만 사람들에 섞였다.

 

빛이 앞을 가려 어디서 나는지도 모르겠다. 입술이 부르트고 바람이 얼굴을 때려 얼얼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하라고 달래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물도 겨우 병아리 목으로 흘리는데 더 낼 기운도 없다. 약 때문에 몸이 무감각하고 머리가 멍해서인지 마음까지 착잡하다.

 

언젠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고 싶었는데, 너무 추워서 그 맘이 싹 가셨다.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비겁한 생각이 떠오른다. ‘내려 올 산을 뭐 하러 힘들게 다니냐!’,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다.

 

 

칼라파타르를 오르면서 눈물이 땅을 적셨다. 티내지 않으려고 훌쩍이며 딴 생각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창피하게 눈물은 왜 나는 걸까, 앞이 흐려져 보이질 않는다. 그리워하던 에베레스트를 눈앞에 보게 된 탓일까? 열흘을 걸으며 수 없이 생각했다. 난 왜 여기 온 걸까?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어쩌면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세상과 멀리 떨어져 보고 싶거나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에베레스트 였을지도 모르겠다. 돌아가면 생각해 보자. 목표인지 꿈인지 모를 것을 앞에 두고 있는데 빨리 내려가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망각을 만들어 내는 걸까, 아니면 충격이 커 나타나는 트라우마(Trauma)가 이런 걸까. 오면 들고 가면 꼭 잊힌다. 가까이 있어도 속아서 당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이제는 먼 곳까지 와 이 모양이다. 습관성 질환이 되어버린 걸까. 사람 호리는 재주는 타고나서 금세 잊고 다시 빠지게 만든다.

 

감동이, 우동이도 아닌 것이 신묘한 재주를 지녔다. 돌아가서도 기억이 나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놈의 생각이 하얗게 지워지고, 누가 조작한 건지 그리움만 남긴다. 벗어나지 못할 상황이나 되어야 번뜩하고 떠오르는데,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 항상 때가 늦다. 허탈하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스무 살 무렵 시작되었으니 20년이 다 되어간다. 한 때는 일 년 열두 달 그랬고, 그 동안 돈도 많이 날렸는데 이번엔 정말 크게 당했다. 나도 더 이상은 못 참는다. 이번에는 정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돌아가서도 꼭 지금의 치 떨리는 심정을 잊지 않을 거다

‘내, 이놈의 산 두 번 다시 오나 봐라!’

퍽퍽한 땅, 걸음 마다 쉬어가며 올랐다. 걷다가 멈추고 기다가 멈추었다.

버텨야지! 무릎을 짚고 다시 일어나 차오르는 숨을 골랐다.

설산 고봉들이 사람 호리는 재주는 타고나서 망각을 만들어 다시 나를 이끈다….

* 다시 페리체에

내려와서 늘 먹던 계란 볶음밥을 시켰는데, 숟가락을 30분 동안 들고 있다가 물렸다. 한 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에 감각이 없다. 산에 올라 힘든 것 이상이다.

 

30분, 아니 한 시간을 그러고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 약 먹은 지 12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조금 나아질테지. 정신차리고 일단 하산을 해보자. 고도라도 낮아지면 나아지려나. 다행히 하산하면서 몸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왔다. 함부로 먹을 약이 아닌 것을 모르고 먹어 큰 고생했다.

페리체 도착 무렵 세시가 넘었는데, 디보체까지 욕심을 내려다 되돌아 왔다. 아니나 다를까, 곧 안개가 뒤덮고 전처럼 안개비가 지붕이며, 돌이며, 제가 적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흠뻑 적신다. 정신이 맑아져 양말 빨고 더운물 얻어서 머리 감고 발까지 대충 씻었다. 물 칠만 한 셈이지만 한결 개운하다.

 

 

오를 때 묵었던 집을 다시 왔는데, 오늘은 이 집에 손님이 아무도 없다. 나도 부엌에서 안주인과 부엌일 하는 아가씨, 포터 비까슈크라이와 함께 밥을 먹었다. 미스터 한이 고락셉의 롯지에서 나누어 준 김볶음, 마늘쫑 짠지, 멸치볶음을 함께 먹으며 여주인과 부엌 살림하는 아가씨에게 맛도 보였다.

 

아가씨와 비까스의 관계를 물으니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비까스, 이 놈이 아가씨에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 이리로만 끌고 오지.

식사 후에 부자간으로 보이는 마을 사람 둘이 찾아와 티비(TV)를 틀었다. 휴게실로 나아가니 15인치쯤 되는 티비(TV)로 영화를 보고 있다가, 나에게 불을 끈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태양열로 전기를 사용하는 것이니,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한 모양이다. 불을 모두 끄고도 여섯 시간 정도 밖에 시청할 수 없다고 한다.

 

알고 보니 디비디(DVD) 플레이어를 작동시켜 보는 것이었다. 롯지를 운영하는 이 들이 네팔에서는 상류사회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영화는 인도 뮤지컬 영화인데 나에게는 다소 유치하다. 대화하다가 갑자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재밌어서 웃었더니, 사람들이 내가 웃는 걸 신기한 듯 쳐다보며 덩달아 웃는다. 많이 본 탓일까.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노래도 따라한다.

 

인도영화는 특성이 강해서 국제사회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영화 산업이 발달한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조합인 볼리우드라는 단어로 소개되는데, 대부분이 뮤지컬이다. 최근에 여성 테러리스트와 기자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딜세’에서 본 기차 위의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무희들과 함께 춤과 노래를 펼치는 장면인데, 음악도 매력적이고 증기기차 위의 춤판이 신기하고 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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