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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14>-전병현의 예술세계

순백 민족의 정기 화폭에 담아내다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오랜만에 교외로 나갔다.

5월 중순 초여름에 맞는 갖가지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러 색의 장미꽃들이 한창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철쭉은 겨우 꽃 몇 송이만을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지난달엔 그 철쭉 옆으로 진달래가 만개하여 필자의 마음을 황홀하게 하였었는데….

세월은 빠르게 훌쩍 지나가고, 인생은 꽃처럼 그렇게 피고 지는 것일 게다.

그래서 사람은 영원함을 사모하는지도 모른다.

우리 화단(畵壇)에는 이처럼 피고 지는 꽃들을 사랑하고 즐겨 그리는 화가들이 여럿 있다.

어떤 이는 처음 보는 들꽃에 매료되어, 밥 먹고 잠자는 것 외에는 매일 그것만을 그리기도 한다.

그만큼 꽃은 우리에게 여름날의 청량음료와 같은 시원함과 신선함 및 감동을 준다.

 

어느 날 화가 전병현과 같은 동네에 사는 어느 비구니가

그의 그림을 보고 참으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딱딱하고 어두운 그림을 그리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꽃 한번 그려 보세요.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 말을 듣고 전병현은 “사내 녀석이 남우세스럽게 꽃은 무슨 꽃….” 하며 웃어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가까운 동산에서 지천으로 피어있는 진달래를 보게 되었다.

그날따라 만개한 진달래는 화사한 봄 향기를 가득 담고 찾아온 선녀의 아름다움처럼 황홀하고 감동적이었다. 동네 스님이 얼마 전에 말했던 꽃들의 의미가 새록새록 가슴에 와 닿았다. 마치 산들거리는 봄바람처럼 말이다. 봄을 전하는 전령과도 같은 이 연분홍 진달래는 화사하고

선명하면서도 다소곳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전병현은 이 같은 감흥을 그림으로 표현하려고 곧바로 화실로 돌아와 붓을 들었다.

어색할 것만 같은 꽃들이 예상과 달리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와 그의 마음에 가득 찼다.

이때부터 작가는 본격적으로 꽃을 그리며 마음의 고향을 상실한 우리 현대인의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불어 넣어주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표정만큼이나 밝고 건강한 꽃그림을 그려서 우리 시대의 삶에 활력을 준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작품에서는 백색의 투박함이 유난히 돋보이며,

그 깊이감과 더불어 순수함도 느껴진다.

작가는 자신에게서 풍겨지는 이미지에 걸맞게

그 동안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자연의 대상을 형상화하기 위한 기본기를

탄탄하게 배울 수 있었으며 프랑스 미술대학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하였다.

그리고 현대미술의 대가인 고암 이응노선생에게서 3년여 동안 그림을 배웠다.

이는 아마도 오늘의 전병현의 예술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작가가 이응노선생과 사제지간이라는 점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이응노 선생은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인정받는 대가로서 그 동안 많은

훌륭한 그림을 남겼으며 우리와 같은 시대를 함께 호흡한 보기 드문 화가라 하겠다.

언젠가 필자가 수덕사를 찾았을 때 사찰 앞 수덕여관의 큰 바위에 조각된

이응노선생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고암의 작품에는 멋과 맛이 배어있다고 생각되었다.

전병현이 고암과 함께한 시간들은 그에게 각별할 것만 같았다.

며칠 전에 작가와 함께 간단히 술을 겸해서 점심식사를 하였는데,

비록 낮 시간대이기는 했지만

편하고 여유로웠다. 대화 속에서 시간이 갈수록, 마치 한 잔의 술이 속에서

풀어져 흡수되듯이 전병현 특유의 인간미가 전해져 왔다. 이응노의 영향을 받아서일까.

전병현은 프랑스에서 대학을 나오고 그곳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한국적인

예술철학을 바탕으로 자신 있게 작품을 전개시키는 두둑한 배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업세계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하게 프로 냄새가 느껴졌다.

한지 닥죽을 두텁게 사용하여 한국적인 투박함과 텁텁함을 함축적으로

잘 담아낸 그의 작품에서 우리의 정서와 미를 느낄 수 있었다.

 

 

표면의 릴리프를 강조하다 보니 작업하는 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는 그의 작품에서는

만개한 순백의 꽃들 사이로 달처럼 덩그런 순백색의 백자로 된 달 항아리가 한국적 정서를 강조하는 듯하다.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와 예술을 살펴보면,

달은 그림뿐 아니라 고분 벽화나 시, 가요, 도자기 예술 등에도 등장한다.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시대 가요인 ‘정읍사’는 행상을 떠난 남편의 안전을 지켜주는 바탕을 달에 두고 있다. 또한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에는 어둠 속에서

밝게 비치는 달이 만고의 벗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달은 도공의 손을 통해 달 항아리로 태어나 우리와 삶의 애환을 함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달 항아리를 통해 서민들의 삶의 향수를 형상화한 것 같은

그림이 바로 전병현의 그림들이다. 달빛의 은은함과 살가움 그리고 정겨움을 담은

전병현의 달 항아리가 있는 꽃 그림에는 우리 민족의 삶과 선조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 어떤 것과도 조화를 이루는 원만함을 담은 전병현의 달 항아리는

우리 민족의 기질인 순박함과 여유로움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 문양이 없고 깨끗한 달 항아리, 화사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은은한 흰빛의 향내를

품어내는 꽃들, 그리고 한지의 순백의 맛이 감칠 나게 넘실대는 바탕에는 백의민족의 순박하고 넉넉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 전병현의 작업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긴 통로처럼 느껴졌다.

그 통로 한쪽에 있는 많은 종류의 책들이 살갑게 필자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그 책들 속에는 여러 사람의 생각과 시간들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숨결도 있을 것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도 담겨있을 것이다. 마치 전병현의 삶의 숨결이 담긴 그림처럼 말이다.

전병현은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 민족이 지닌 정서와 우리의 아름다움을 그리기에, 한국적인 풍류와 멋을 느낄 수 있는 그의 예술세계는 주목할 만하다. 더 나아가 작가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도 민족적인 정감과 풍류의 맛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맛, 자연의 흐름에 함께 숨 쉬는

가장 한국적인 그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전병현의 그림인 것이다.

글=장준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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