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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36>-신경호의 예술세계

 

정치, 사회, 경제문제 등으로 국내 정국이 혼미했던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닌 사람치고 데모 진압용 최루탄을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특히 전라도 광주는 민주화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투쟁한 곳이며 소탈하고 투박한 서민들이 부대끼면서 사는 정감 있는 곳이다.

광주민중항쟁이 있던 당시 광주에 살았던 사람들의 가슴 한 구석에는 지금도 분노와 연민과 양심의 가책 등이 복합된 미묘한 감정이 남아있다. 그 당시 군사 쿠데타의 주동자들이 오늘날에도 아무 제약을 받지 않고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어도 빛고을 광주는 말이 없다. 민중의 도시 광주로 향하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불현듯 ‘5월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신경호는 당시 광주의 아픔을 가장 많이 보고 느끼며 이를 그림으로 담아온 광주가 낳은 걸쭉한 인물이다. 민초들의 삶을 화폭으로 담아내는 광주의 화가 신경호는 군사 쿠데타의 주동자들에 의해 간첩단의 수괴로 내몰려서 곤욕을 치렀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 그의 작품 여기저기에서 보아왔던 무덤과 부엌칼 그리고 초승달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였다. 작품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열심히 하지 않아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여느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열심히 하지 않아 보여줄 게 없다고 소탈하게 말했다. 그런 모습에서 오히려 화가로서의 체취가 더 느껴졌으며 강단이 있는 화가란 생각도 들었다. 집에서 키우던 개의 이름을 ‘두환’이와 ‘태우’로 지어 군사 정권에 대한 울분을 삭이기도 했었던 그는 이제 교육자로서 후학들을 길러내는 데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재학시절에 문예반에서 문학가로서의 꿈을 키웠으며, 서울대 재학 시절에는 미대 연극반에서 활동하면서 삼총사인 임옥상, 민정기와 함께 미술을 이야기하며 자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미술을 사랑하였다. 훗날 이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현실과 발언’은 주지하다시피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1980년대 민족·민중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신경호는 ‘현실과 발언’ 창립 전에, 이전부터 줄곧 해오던 문학성이 짙은 작품 ‘넋이라도 있고 없고’를 출품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광주의 대표적인 명산인 무등산을 배경으로 하여즐비한 무덤들과 해를 그리고 그림의 중앙에 커다란 주목을 그려 넣었다. 그런데 그 주먹 그림이 너무 강하다 하여 한 선배가 가필을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늘 메시지가 강하여 주목을 끌곤 했다.

 

그의 작품들은 ‘남아평생도’, ‘지평에 서서’, ‘넋의 넋에게’, ‘허허따라지’, ‘칼 씌우기’, ‘넋이야 진토 되어’, ‘환생’, ‘장생도’ 등 제목만으로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며, 마치 소설책의 제목인 듯 문학성이 농후하다. 그는 단순하게 감성적인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기보다는 그림에 세상사의 깊이와 진실을 담아내고 표현해내는, 삶과 감성의 마술사라 할만하다. 이런 면들은 아마도 그의 타고난 예술적인 천성과 순수성에서 비롯된 듯하다.

언젠가 신경호는 시인이자 후배이며 지금 한국종합예술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인 황지우의 무등산 금곡 마을 작업실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그는 작업실 부근에서 뭔가를 하나 주었는데 그것은 자동차 바퀴에 완전히 납작하게 깔려버린 개구리 한 마리였다. 이 논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참변을 당한 듯싶은 그 개구리는 본 모습이 완전히 와해되어 버려 참혹한 평면만을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황지우에 의하면 이 개구리는 형태가 좀 틀어져 보이긴 했으나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균제를 유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신경호는 자동차 바퀴에 납작하게 되어 개구리라기보다는 평면의 형국으로 하나의 미묘한 형태감을 지닌 이 개구리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주시하고 앉아 있었다. 황지우는, 실눈을 뜨기도 하고 때로는 범상치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화가의 얼굴에서 독특함과 강한 인상을 받았던 듯싶다.

그는 자신이 키우던 개 두환이의 똥을 주워서 오브제 작품을 만들려고도 하였다. 언젠가는 무등산에서 알 수 없는 짐승들의 똥을 주워와 유리관에 진열하기도 하여 황지우를 아연실색케 한 적도 있다. 그래서 황지우는 이런 신경호의 작품에 대해서 “그가 무등산에서 주워왔다고 하는 이 망측스러운 ‘미술’은 어느 지점에선가 뒤샹의 변기와 만나고 있다고 보이지만 똥 그 자체를 미술 작품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 작가는 아마도 신경호뿐일 것이다”라고 토로한 적이 있다.

이처럼 신경호는 마치 그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인 듯하다. 그의 70년대 유화 작품을 보면 회화성과 작품성이 깊어서 보는 이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준다. 많은 시간 동안 그림으로 숙련된 화가들이라고 해서 다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타고난 예술적 천성이 함께 하여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민중미술의 중심에서 감성적이고 좋은 작품을 남긴 그는 앞으로도 그 이상의 좋은 작품을 남기는 화가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필자의 눈으로 본 그의 화가적인 끼가 너무도 단단하고 야무지기 때문이다. ■ 글=장준석(미술평론가)

 

신경호 (申 炅 浩)

1949년 광주에서 태어나 중앙초등, 서중, 제일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이후 전남대학교에 봉직하면서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거쳐 현재는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92년 ‘넋이라도 있고 없고’ 라는 주제로 예술의 전당(서울)에서, 그리고 광주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1995년 제 1회 광주비엔날레에 한국대표작가로 출품한 이후 미국에서 1997년부터 1998년까지의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방문교수 시절에 오픈 스튜디오 쇼를 가졌다.

 

1998년 가을 창평으로 은거한 이후에는 후학을 위한 교학과 작품제작에 열중하면서 2005년에 개관한 달뫼미술관 관장으로 한국 리얼리즘 미술의 본격적인 정착과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는 화가
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필자의 눈으로 본 그의 화가적인 끼가 너무도 단단하고 야무지기 때문이다. ■ 글=장준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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