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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노점상 소년에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이명박 그는 누구인가?

샐러리맨의 살아있는 신화, 청계천 신화에 이은 대권신, 찢어지게 가난했던 목부(牧夫)의 아들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유년기와 청년기의 고난과 풍파를 딛고 마침내 청와대의 주인으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이 당선자는 CEO(최고경영자) 출신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으며,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서울시장)을 거쳐 행정수반에 오르는 ‘그랜드 슬램’까지 달성했다. 그의 일대기는 굴곡 많았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의 오늘을 키운 힘은 ‘가난’과 ‘어머니’, 그리고 ‘긍정의 힘’으로 압축된다.

 

철들기 전부터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벌였던 좌판은 그를 강인하게 단련했고, 찢어지는 가난함 속에서도 안정된 가풍을 만들었던 어머니는 그의 인간성 형성에 자양분을 제공했으며, 수없는 위기에 맞닥뜨리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신념은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했다는 게 이 당선자의 ‘자찬’이다.

 

 

◇가난 그리고 어머니=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목부였던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4남 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 가운데 다섯째였다.

 

족보에 올라있는 이 당선자의 이름은 다른 형제들과 같이 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相京)’ 그러나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출생지가 일본인데다 형제들과 달리 호적상에 돌림자를 쓰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아키히로(明博)’라는 일본 이름과 한자가 같아 “어머니가 일본인이다” “아버지가 조총련이다”라는 ‘뒷말’을 낳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귀국선에 올라 아버지는 동지상고 재단 이사장의 목장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가난은 지겹도록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와중에 집안의 희망은 포항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둘째 아들(이상득 국회부의장)이었고, 자연히 이 당선자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 6.25 전쟁을 겪으면서 누나(귀애)와 막내(상필)를 잃고,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이 당선자는 술 지게미로 하루 두끼를 때웠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아예 어머니의 풀빵장사를 돕기위해 길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결국 동지상고(야간) 수석 합격과 3년 연속 수석을 이뤄내 무일푼으로 고교 졸업장을 따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이 당선자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대입을 준비했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헐값에 구입한 참고서로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다.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근근이 학비를 마련하며 대학을 다녔던 이 당선자는 3학년때는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6.3사태의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 ‘민주화 투사’라는 이력을 보탰다. 그러나 그는 석방 한달여만에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왕 회장과의 만남=이 당선자의 일생에서 어머니 만큼이나 큰 인연은 역시 ‘왕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가난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정주영이라는 기업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의 남다른 기질은 취직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이라는 중소기업에 입사한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제기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불과 35세에 현대건설의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최고경영자)의 역사를 쓰게 된다.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계에서 3번째로 긴 말레이시아 페낭대교(연륙교)를 건설하고 이라크 화력발전소를 짓는 등 열사의 중동에서부터 동토의 시베리아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경영자로 자리매김했다.

 

현대그룹 재직 때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부인 김윤옥씨와 결혼했고 세딸(주연, 승연, 수연씨)과 외아들(시형씨)도 얻었다. 20여년간 CEO로 지내면서 돈도 많이 벌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따뜻한 불도저’ 시장=민선 3기 시장으로 서울시청에 들어선 이 당선자는 4년간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과 서울광장 조성 등 역대 어느 시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표적인 사업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청계천 복원. 취임 즉시 작업에 착수, 불과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의 물길을 다시 시민의 품으로 넘겨줬다.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유산 훼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장 문제 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으나 4천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 청계천을 시민 휴식공간, 관광명소는 물론 생태자원의 보고로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그의 치적으로 꼽힌다.

◇‘여의도 입성’ 15년 그리고 대권=이 당선자가 기업을 박차고 나가 정치를 처음 시작한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앞서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천6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데 반발해 아예 당을 만들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뜯어말렸던 이 당선자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녹록지 않은 또 다른 세계였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고, 이 와중에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1년여 와신상담하던 그가 1999년말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로선 생소하던 인터넷뱅킹 사업을 시작하면서 만난 사람이 최근 대선정국 막판까지 발목을 잡았던 이른바 ‘BBK 의혹’의 핵심인물 김경준씨다.

서울시장 선거공약으로 ‘청계천 복원’을 걸었던 그는 이번에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과 ‘대한민국 7.4.7’을 제안했다. 다수의 반대를 꺾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을 성공시킴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 각인시킨 그는 보수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면서 이념, 연령, 계층, 지역을 뛰어넘어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그는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선진화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은 대한민국의 숙명”이라며 5년간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또다시 험난한 역사의 파도속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 당선자는 자신의 인생역정에 대해 “신화는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신화는 현재진행형이다. 그에게 위탁된 향후 5년이 어떤 국가적 신화로 승화될지 유권자들은 지켜보게 될 것이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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