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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대탐험] 5. 역사왜곡의 현장

박작성·구련성 등 고구려 역사 왜곡 심각
우리 민족 정체성 흔들 역사관 정립 시급

 

 

고구려는 700년 동안이나 중국을 위협한 위대한 ‘성의 나라’이다. 중국 내 강변을 끼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는 곳이면 여지없이 고구려성이 존재하고 있다.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위치 선정과 자연절벽을 이용한 방어위치 선정, 옹성과 치를 비롯한 체계적인 방어구조물 등은 한마디로 천하의 요새, 바로 그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지고, 허물어지고,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 못한 고구려의 성벽이지만 당대의 어느 누구도 이러한 고구려성을 넘지 못했다.

 

특히 고구려성은 중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을 통한 승리의 영광과 패배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700년 고구려 역사의 증인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 700년 역사를 증명하는 증거이다. 이러한 증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태자하를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말이 없지만 1천500년 전 이곳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천하를 풍미했던 고구려인들의 기상과 말발굽 소리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아 부활의 시기를 고대하고 있다./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고구려 석성의 기원
2.천혜의 요새 봉황산성-환도산성
3.평지토성 국내성-하고성자성
4.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
5.역사왜곡의 현장
6.훼손되는 고구려 유적지
7.연천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8.구리의 아차산성

 

 

 

 

 

 

 

 

 

지우고 지우고 또 지워도 역사는 알고있다 700년전 비밀을…

고구려는 삼국시대의 가장 큰 한 축으로서 지금은 잃어버린 영토인 저 넓은 만주 벌판과 간도지방을 호령했던 나라다. 고구려는 주변의 강대국들과 싸우며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강인한 모습을 표출했다.

본지 탐사단이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700여년전 찬란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무참히 짓밟히다 못해 우리의 미래까지 도난당하고 있음을 생생히 목격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구려 유적지에는 고구려를 ‘중국 북동부의 지방정권’,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 등으로 표기한 안내판이 붙어 있고, 박물관에는 만리장성을 북한의 평양성까지 연장해 놓은 지도가 버젓이 전시되고 있다.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이곳을 찾는 중국인과 외국인 등에게 동아시아 대제국이었던 고구려의 역사가 누구의 역사로 기억할까?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서 고구려에 대한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 고구려 역사가 없다면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한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웅혼한 고구려인들의 혼백이 묻힌 땅, 그러나 찬란했던 그 역사가 무참히 짓밟히는 땅.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되찾으리라 기원해본다.

◇박작성(泊灼城)

고구려가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해 세운 박작성은 단동시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압록강 하구에 서안평성-구련성-박작성-대행성을 쌓아 압록강 방어체계를 구축했으며, 박작성은 산을 의지해 성을 쌓은 데다 압록강이 가로막고 있어 매우 견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고구려인의 혼이 담긴 박작성을 완전히 허문 뒤 명나라 때 사용하던 시커먼 벽돌로 성을 쌓아 ‘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 부르며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 주장하고 있다.

박작성 입구에는 중국이 2006년 10월 ‘만리장성 동단기점 호산’이라는 글과 함께 반인반수의 동상을 세웠다. 중국 측 사서를 보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하북성 발해만 연안의 산해관(山海關)이고, 서쪽 끝은 감숙성 가욕관(嘉欲關)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호산장성 복원공사가 끝난 1990년대 중반부터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산해관이 아닌 호산장성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대로 굳어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호산장성의 박물관은 왜곡과 날조의 생생한 현장이다. 박물관 입구 정면 벽에는 ‘중국 명 만리장성 동단기점’, ‘만리장성에 이르지 못하면 대장부가 아니다’, ‘기점에 가지 않으면 유감을 남긴다’ 등의 문구가 한글로 적혀 있다. 특히 왼쪽 벽면의 안내판에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표기했다가 우리나라의 반발을 사자 최근 진(秦)을 명(明)으로 바꿔 ‘명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표기된 안내판이 붙어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산해관이 끝인 만리장성을 한반도의 평양성까지 연장해 그려놓은 황당한 지도를 볼 수 있으며, 중국 삼국시대에 오나라 손권에게 고구려가 배알하는 장면의 그림도 있다. 이는 오나라가 황제국, 고구려는 신하국 처럼 대조해 놓은 것으로 고구려가 중국이 변방역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역사의식 없이 이런 지도와 그림을 대하는 중국인과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고구려 역사가 누구의 역사로 기억될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제 얼마간의 세월이 지나면 그나마 주변에 남아 있는 박작성터는 완전히 없어지고 우리들의 기억속에서도 사라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 뿐 아니라 중국 역사를 철저히 연구하고, 나아가 동북아와 아시아 전체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해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할 때다.
 

 

 

 

 

 

 

 

◇구련성(九連城)

전편 국내에 잘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지에서 소개한 구련성은 단동 박작성(호산장성)에서 8㎞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중국이 동북공정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이는 중국이 고구려의 박작성을 왜 호산장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만리장성 동단 기점이라고 주장했는지에 대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구련성은 단동에도 있지만 요녕성 서남쪽 즉 만리장성 끝인 산해관 동북쪽에도 같은 지명의 구련성이 있다.

산해관에 남아 있는 구련성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남아 있는 성으로 ‘고구려성’으로 불리우며, 이 성이 갖는 상징은 ‘만리장성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를 빌미로 만리장성 동쪽 끝을 산해관이 아닌 단동 구련성으로 확정하고, 이곳에서 8㎞쯤 떨어진 고구려 박작성을 명나라식으로 복원한 뒤 호산장성으로 부르며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06년 요녕성 고고연구소는 단동 구련성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빠르면 올해부터 시작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곳을 발굴해 중국계 유물들이 나올 경우 ‘산해관이 만리장성 동단’이라는 중국학계의 정설을 뒤집어 ‘단동 구련성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란 주장을 더욱 강하게 펼것이다.

한반도를 발굴해도 중국계 유물이 많이 나오는데 이곳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당연히 중국계 유물과 고구려 유물이 함께 출토될 것은 뻔한 이치다.

일반적으로 중국학계가 평지성을 발굴하는 사례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동 구련성을 발굴하려는 것은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변방역사로 고착화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국동대혈

집안 국내성(國內城)에서 동쪽으로 17㎞ 떨어진 높은 산중턱에 위치한 ‘국동대혈’(國東大穴)은 해마다 10월이면 고구려왕이 군신들을 거느리고 ‘동맹’을 지내던 곳이다. 수혈과 통천혈 사이에 애혈(愛穴)이 있는데 얼핏 지나치면 잘알아볼 수도 없을 작은 바위굴 앞에 ‘장상애’(長相愛)라는 붉은 글씨가 씌여진 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에는 유리왕이 한인 부인을 쫓아 이곳까지 왔다가 잡지 못하자 그 마음을 달랠길 없어 이곳에 올라 ‘황조가’(黃鳥歌)라는 노래를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안내판에는 유리왕 3년에 한인 여자를 강제로 부인으로 맞이했으며, 또한 국동대혈에서 노래를 불렀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유리왕 연대가 맞지 않는다. 유리왕 3년은 고구려 도성이 환인의 홀승골성이었다. 유리왕이 집안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유리왕 22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즉 황조가를 지은 연대가 유리왕 3년이면 당시 도성이 환인이었을 텐데, 안내판에는 집안을 도성으로 적고 있다.

또 한인부인이 도망을 갈 때 이곳(집안)으로 왔을 가능성이다. 도망을 간다면 자기 고향쪽으로 갈일이지 왜 북쪽 산골로 도망을 쳤을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처럼 중국은 연대를 보더라도 유리왕 3년에 생긴 일을 동왕 22년에 붙이면서 날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집안박물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찾은 집안박물관은 그야말로 역사왜곡의 압축판이었다.

박물관 로비에는 천장까지 닿은 대형 광개토태왕비 탁본이 걸려 있고, 그 아래 1.5m쯤 되는 돌모양의 표지판에는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 발전과 생산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라고 적혀 있다.

이는 한국인을 목표로 한 것이기 보다는 일반 중국인들에게 입구부터 고구려를 자기 역사로 알도록 역사왜곡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또 바로 옆 전시실에는 고구려가 중원의 각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음을 강조하는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高句麗朝貢受封簡表)와 ‘고구려 유민 천도 정황’(高句麗流民遷度情況)을 전시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존속한 700여년 동안 중국에서는 35개 나라가 망했으며, 그 가운데 50년도 못가고 망한 나라가 절반이 넘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되는 역사왜곡인 것이다.

 

특히 고구려 유민 이주현황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이 중국 땅으로 유입돼 중국 민족이 됐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 학자들이 고구려가 중국사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자주 사용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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