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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48>-김태신의 예술세계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살아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죽음이 인연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었고, ‘삶의 본연을 자각하고 깨닫는 행위’가 작업의 실체가 되어 있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인간 존재의 삶을 세상 밖에 있는 또 다른 실체인 불(佛) 통해 조응(照應)하는 일이기도 하다.

경상도는 예로부터 다른 지역에 비해 불교가 활성화 된 곳으로써, 경주의 석굴암, 남산, 대구의 팔공산 등등 많은 곳에서 불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경북 김천에는 직지사(直指寺)라는 고찰이 있는데 불교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거나 가봤을 만큼 널리 알려진 크고 유명한 사찰이다.

직지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일당(日堂) 김태신(金泰伸)은 화단에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노 화가이자 스님이다. 그가 화단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까닭은 매스컴이나 언론에 드러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겸허한 성품 때문이다. 그는 올해로 팔십 중반을 훌쩍 넘긴 분으로서 현대 화단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화가이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 나이에 비해 아직도 정정할 뿐만 아니라 동안(童顔)의 얼굴을 지닌 김태신은 마

 

치 그림으로 수행 중인 스님처럼 보인다. 필자가 몇 개월 전에 종로 부근에서 삼사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를 처음 대했을 때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지닌 작가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조만간 직지사를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마당발로 통하는 몇몇 미술관계자들에게 스님에 대해 알아봤으나 모른다는 답이 전부였다.

KTX에 몸을 싣고 자동차에 몸을 맡기면서 몇 시간이 지나자,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손꼽히는 직지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한국 불교 1천 6백년의 역사가 담

 

겨있다고 알려져 있는 황악산(黃岳山)의 직지사는 아름다웠다. 마중 나온 양아들의 후덕한 얼굴이 여행에 지친 필자의 마음을 녹녹하게 녹여주었다. 노 화가가 기거한다는, 해발 육백 미터에 위치한 암자로 갔다. 그가 필자에게, 묵묵하게 그림에만 정진하면서 불타의 세계를 궁구하는 존재로 각인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에게선,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소위 대가라는 사람들의 몇몇 이율배반적인 이중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입은 잔잔한 불타의 미소와 함께 속세의 번잡함이나 사사로움을 비켜가는 혜안이 있는 듯하였다. 중생구도와 자비라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안고 화폭을 친구삼아 밤낮으로 그림을 그리며 조촐한 삶을 꾸려가는 수도자였다.

이런 스님이, 우리나라 근대 신여성 1호라고 불리는 김일엽(金一葉) 스님과 일본 최고 명문가의 자제이자 조선 총독부에서 고위관리를 지냈던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총독부 고위 관리를 지낸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평생 독신인 채 김태신의 보이지 않는 후견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는 그를 이당 김은호 선생에게 보냈는데, 김은호 선생은 그를 양아들로 여기며 끔찍이 보살피면서 각별한 관심으로 그림을 가르쳤다.

동경제국대학에서 서양화와 동양화를 두루 섭렵한 그는 고야산(高野山) 불교 대학을 다니며 불교에 심취되었고, 66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출가하여 화가스님이 되었다. 지금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원로 작가이거나 성공한 화가로서 작고한 어떤 이들은, 당시에 스님의 예술가적 역량에 위기의식을 갖고 좌파적 성향을 지닌 간첩쯤으로 음해를 해서 그가 귀국할 수 없도록 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어려서부터 마음 깊은 곳에 소중하게 간직해 온, 수덕사에서 평생 수행을 해온 스님인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으며, 그 후로도 십년 이상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런 아픔을 가슴에 담고 일본에서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김태신이 노년에 출가한 것은 어려서부터 이어온 불가와의 인연과 그의 인생역정에 자연스레 흐르는 불심(佛心), 그리고 어려서부터 스님이 되고자 한 열정 때문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살아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죽음이 인연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깨달음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었고, ‘삶의 본연을 자각하고 깨닫는 행위’가 작업의 실체가 되어 있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인간 존재의 삶을 세상 밖에 있는 또 다른 실체인 불(佛) 통해 조응(照應)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있는 곳에 서기어린 기운이 함께하기를 원한다. 부처의 여명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향기를 내뿜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는 살아있는 자연의 본 모습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압축되어 있다. 조형적 감각의 틀 속에서 보이지 않는 부처의 향기가 하나의 기운으로 상서롭게 잉태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가적 사유방식으로 삶을 직시하며 현실세계를 온화하게 변화시키려는 스님의 예술 정신에는, 불가와 동양적 사유 속에 스며있는 해탈 및 초자연적인 초월의 경계가 함께하고 있다. 불교적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무거운 세상사의 마음의 벽을 깨뜨리고 또 다른 삶의 감정을 불어 넣을 수 있는 구도자 같은 자세를 지니는 것이다. 실상 인간의 존재란 잠재해 있는 무서운 죄의 심리와도 맞닿아있다. 스님의 그림에서는 인간의 본연의 향기를 발산할 수 있는 자연의 향기가 불심 속에서 빛을 발한다. 노스님은 이런 보이지 않는 향기를 발산하기 위하여 시련들을 의연히 버티고 자비와 자애로 많은 사람들을 감싸 안았는지도 모른다.

필자가 방문하던 날에도 일당스님은 그곳에서 마치 선정(禪定)에 들어간 것처럼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노스님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팔십오 세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은 힘이 느껴졌고 그림을 그리는 데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는 비록 일본에서 얼마간 생활하고 활동하였지만, 그의 채색 그림에는 고구려의 강렬하고 선명한 벽화처럼 깨끗하면서도 윤택한 색의 흐름이 있다. 어떤 부분은 우리의 민족적인 기질처럼 투박하면서도 구수한 면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슬픔에 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한 가을을 노래하는 듯도 하다. 심신 깊숙이 삶의 애수가 느껴질 만큼 뭉클하면서도 정련된 색들은 불가의 극락정토를 연상시킬 만큼 고결하고 맑다. 모든 군더더기를 훌훌 털어버리고 남은 색의 정수만이 노스님이 그린 화면에서 산을 이루고 물을 이루고 꽃을 이룬다. ■ 글 = 장준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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