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석의 작가탐방<53>-유수종의 예술세계
장준석의 작가탐방<53>-유수종의 예술세계
  • 경기신문
  • 승인 2008.06.1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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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신문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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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유수종

어떤 대상을 미적으로 표현해내는 데는 예술가들에 따라 많은 차이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조형적 감각의 정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똑같은 미대를 다니면서 같은 교수로부터 그림을 공부해도 개개인의 조형 능력과 그에 따른 작품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조형 작품을 놓고 어떤 것이 더 좋은 작품인가를 단정하긴 어렵지만, 대체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전문가의 시각으로 선별되어지는 것이 좋은 작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유수종의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사군자의 형식을 갖추었으면서도 진지하고 단아한 선묘와 미적 감각으로 뭉쳐진 예술적 조형성을 보여준다. 문인화적인 그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그의 작품에선 진지한 예술성이 느껴지는데, 이는 그가 미적 조형 능력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진지하고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먹을 재료로 한 여느 그림들보다도 색다른 묘미를 지니고 있다.

의정부와 고양의 경계쯤에 있는 유수종의 작업실을 향해 의정부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작업실은 그림을 그리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으로 보였으며, 한 작가의 예술 세계를 살펴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조그마한 미술관을 연상시켰다. 그는 ‘이곳이 자그마한 천을 끼고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음식점도 몇 군데 생겼고 조금은 혼잡한 곳이 되어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작업실의 높은 천장에 맞서 버티고 서있는 듯한 유수종의 여덟 폭 병풍을 보며 그의 창작 열정과 더불어 오랜만에 색다른 문인화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즐거웠다.

감칠맛 나는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유쾌한 기분만 든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화단에서 전통 문인화가 위축되어 버린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많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새로운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보다는 서양의 예술 작품에 매료되어 그와 유사한 작품을 만들려는 예술가들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먹으로는 그림을 쉽고 빠르게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국화가들의 그릇된 인식이 한국화나 문인화의 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진지하게 조형성을 만들어가는 진정한 문인화가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은 가슴 아픈 일이다.

필자는 우리의 문인화가 깊은 맛을 지녔다는 것을 새삼 실감할 때가 있다. 특히 조선 시대의 그림에서 선 하나하나에 깊은 정성과 내공의 힘이 들어간 조형미를 감지할 때면 더욱 그러하다. 동양의 예술 철학을 잘 모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문인화가 얼마만큼 심도 있고 어려운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수종은 점 하나, 선 하나마다 진지한 마음으로 온갖 정성을 다한다. 마음과 정신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진 하나하나의 점과 선들이 조화를 이루어 죽(竹)이 되고 난(蘭)이 된다. “저는 선 하나를 그어도 사물에서 마음에 와 닿는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그 속에 집어넣으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한국화나 동양화에서는 특히 정신과 마음에서 이루어진 관조(觀照)나 사물에 대한 조응(照應)이 중요하다. 유수종의 그림은 점 하나, 선 하나에서부터 담아(淡雅)하고 깊은 맛을 풍긴다. 이는 마음의 눈으로 대상과 대화를 하며 마음과 정신을 모아 붓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수종은 붓을 잡을 때도 중봉을 취하기를 즐긴다. 중봉은 심안(心眼)과 도(道)를 구현하는 가장 훌륭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그는 십여 년 전에 사군자에 대한 책을 당시 일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하여 출간하였다. 그 책은 사군자에 대한 화법을 담았는데, 필 하나하나마다 깊이가 있는 수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책들이 국내에 없는 건 아니지만 그처럼 필력이 담아하고 은근한 것은 흔하지 않다. 그러나 빚으로 출간한데다가 출간 무렵이 국제통화기금(IMF) 시절이었기에 집을 줄여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문인화에 대한 열정 때문에 그 같은 책을 출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신처럼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든 책이 낙후돼 가는 문인화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었다.

사군자를 좋아한다는 그는 언제나 묵향에 흠뻑 젖어있다. 스승에게서 꾸지람을 들어가면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에도 사군자에 대한 매력은 변함이 없었다. 유수종은 이십여 년 전에 중국 청대(淸代)의 대 화가 석도(石濤)의 화론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는 일 획(一劃)을 긋는 데도 더 큰 정성을 쏟게 되었다. 석도의 말처럼 일 획 속에 모든 세상의 진리가 담겨있듯이, 작가는 자신의 일 획에도 세상의 향기가 담겨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사군자에서는, 우리가 흔히 보는 관념적인 사군자와 같은 인습적인 화풍을 느낄 수가 없다. 오랜 시간 한 번의 붓을 긋는 데 자신의 마음을 담는 훈련을 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최근에 그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화면 속에는 자그마한 장미들이 가득하다. 그 동안의 수양과 꾸준한 관찰이, 편하게 붓을 휘두른 것 같으면서도 자연스러운 장미를 만들어냈다. 꽃의 구조나 생김새 등을 살피면서 자연스레 터득된 생기(生氣)가 마음의 장미로 형상화된 것이다. 작가는 이 장미들이, 갈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메마른 세상에 향기로운 사랑을 전해줄 ‘사랑의 장미’라고 믿고 있다. 이 시각에도 ‘사랑의 장미’는 산들바람에 살랑거리며, 향기가 퍼져가듯 사랑을 전해주고 있을 것이다.

■ 글 = 장준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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