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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포럼] 사이버 모욕죄, 자살방지 도움 안된다

 

역사적으로 자살이 처벌되던 때가 있었다. 사회에 대한 의무를 침해하는 범죄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법에서는 병사와 노예의 자살을 처벌하였고, 게르만법에서는 재산몰수의 형을 면하기 위한 자살을 벌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는 자살한 자를 불명예스러운 매장을 통해, 자살이 미수에 그친 경우 그 미수범을 처벌하였다. 자살이 형법으로 처벌되지 않기 시작한 것은 개인의 주체성이 강조되고, 신의 권위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한 19세기 이후부터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근대적 사고방식의 영향으로 인해 자살을 벌하지 않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가족부가 제출한 국감자료는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연간 자살 사망자 수는 1983년 3471명에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8622명으로 급격히 늘었다. 2003년에는 1만명을 돌파하였고, 작년에는 1만2174명을 기록, 연평균 13%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자는 인구 10만명 당 24.8명으로 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수준인데 반해 이웃 일본은 19.1명, 미국은 10.1명, 영국은 6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최근 발생한 일련의 연예인 자살은 사회적으로 크나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故 최진실씨의 사망소식은 불과 이틀 만에 세 건의 모방 자살을 불러와 소위 ‘베르테르 효과’의 확산을 우려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다. 자살한 최씨가 앓고 있던 우울증 진료 실적도 2000년 이후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2000년만 해도 20만명대였던 연간 우울증 진료인원이 지난 해 50만명대를 넘어섰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정부차원의 자살방지 대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질 만하다.

문제는 정치권 등 사회일각에서 자살방지에 대한 해법을 엉뚱한 데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3일 한나라당은 탤런트 최진실씨의 자살을 계기로 인터넷상의 근거 없는 모욕과 악성 댓글을 처벌하는 일명 ‘최진실법’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근거 없는 악플은 표현의 자유가 될 수 없다. 대법원도 인터넷 게시판에 인격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댓글을 단 피고인에게 모욕죄를 적용해 처벌한 예가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사이버 모욕죄까지 신설해야 한다는 것일까? 모욕죄는 명예훼손죄와는 달리 구체적 사실을 적시하지 않고 단지 욕 등의 언사로 인격을 경멸하는 가치판단을 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현재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명예훼손행위는 형법상의 명예훼손죄가 아닌 특별법인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적용되어 ‘사이버 명예훼손죄’로서 좀 더 무겁게 처벌된다. 그런데 바로 이 ‘정보통신망법’에는 명예훼손죄만 규정되어 있고 모욕죄는 별도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인터넷에서 구체적 사실을 다룬 내용이 없는 단순한 욕설과 폭언 등의 행위가 있어도 ‘사이버 모욕죄’가 아닌 형법상 모욕죄로 처벌할 수밖에 없어 법 적용에 불균형이 있어왔다. 바로 이 점이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에 대한 법적 근거다.

모욕죄는 객관적인 명예도 보호하지만 주관적인 명예감과 체면을 보호하기 위한 측면이 강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모욕죄가 존재하지 않는다. 명예에 대한 보호는 명예훼손죄로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박경신 교수에 따르면 모욕죄는 유럽의 국왕모독죄에서 유래된 것이며, 이러한 구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자유민주 체제가 확립된 나라들에서는 대부분 폐지되었고, 우리나라 처럼 모욕죄가 남아있는 국가는 독일과 일본뿐이나 독일은 1960년대 이후 적용된 예가 없고, 일본은 처벌이 매우 경미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존재의의 마저 사라져 가고 있는 모욕죄를, 형을 가중하는 형태로 신설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사이버 모욕죄의 신설로 자살이 방지될 것이라는 생각도 다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자살의 계기가 사이버상의 모욕이나 명예실추에서 비롯될 가능성은 분명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만으로 자살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하지는 않는다. 자살을 조장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 그리고 기타의 심리적 계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자살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 사회는 자살로 삶을 포기하려는 자가 그래도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수 있을 만한 비전과 가치, 재기의 기회를 제시해 주고 있는가? 이러한 고민도 없이 사이버 모욕죄를 신설하려는 시도는 자살방지에 전혀 도움이 못된다. 진심으로 유족들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면서 ‘최진실법’ 운운해 가며 정치적으로 이슈화 하는 것은 오히려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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