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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제언] 현묘(玄妙)한 여성의 힘

형제·가족 부흥에 헌신
위기극복 ‘여성의 힘으로’

 

어느 남자형제보다 학교 성적은 좋았다. 그러나 ‘계집애가 국민학교만 나오면 되지’, ‘네 오빠가 아님 네 남동생이 잘돼야 우리 집안이 일어선다’는 등 비장한 교리(?)가 오랫동안 세뇌되었다. 마침내 국민학교 졸업이후 조그만 보따리가 안겨지고 영등포를 향하는 완행열차에 가련한 몸이 실려졌다. 그리하여 어린 소녀의 신앙적 고행은 시작되었다. 구로공단의 가발공장, 섬유공장 등등에서.

60년대 산업화가 본격화된 이래 근로조건은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들 여공(女工)들은 남자 형제가 보상해줄 복된 가나안(?)을 기약하여 모진 근로조건도 희망적 연단(鍊鍛)으로 감내하였다. 그러기에 이들은 산업화 초기 그 혹독한 이십여년 가량 당연한 목소리마저도 속으로만 삼키며, 그저 묵묵히 일만 하는 우직한 산업역군이었다.

산업화의 주역으로 모씨가 유력하게 논의되곤 한다. 그러나 난 이런 논의의 전개에 반대한다. 우리의 산업화는 특정인의 영도(領導)만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여공(女工)들의 슬픈 자기희생에서 비롯하여 우리의 산업화가 이루어져 왔음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산업화를 추동(推動)하여 온 것은 현묘(玄妙)한 여성의 힘이라 함은 나만의 억지 논리일까? 또 자신의 애사(哀史)와 희생에 대한 적합한 보상을 그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았던 여공들의 배려를 칭송함은 나만의 호들갑일까?

21세기에 들어서며 지식기반산업이 새로운 주류 산업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당연히 정보화를 위한 기초 투자는 빈약할 수밖에 없었고, 지식기반사회란 그 가능성만으로 언급되었을 뿐이었다. 대다수 서구 열강이 지식기반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정보화에 주력하던 그 즈음, 우리는 그저 어떻게 하면 국가 위기난을 극복할까 하는 기본적 생존의 모색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한데 이 시기 우리의 엄마들이 무식한 투자를 했다. 사실 컴퓨터라곤 ‘컴’자도 모르는 그 엄마들이 자기 아이가 정보화 사회에서 소외될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남편 월급보다 훨씬 더 비싼 고가의 컴퓨터를 과감하게 사주었다. 게다가 한가하게 채팅만 할 뿐인데도 꼬박꼬박 월정액을 내가며 전용선도 깔아주었다.

당시 서구 열강은 정보화시대에 요구되는 인프라 구축에 수많은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그 진척이 부진하였다. 반면, 우리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도 무식한 엄마들의 투자로 전 세계에서 가장 앞선 정보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정보화의 진전에 의해 상상 이상의 성과를 누릴 수가 있었다. 디지털 관련 제품, 인터넷 산업, 심지어 한류까지도. 산업화 시기 남자 형제를 위한 가족 부흥의 헌신이 다소 변모하여 내 자식의 교육에 대한 무한정 투자로 이어졌었다.

과감한 투자로 정보화의 초석을 다진 이들에게 이후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졌을까? 유명 전자회사에서 최신형 휴대폰을 공짜로 제공하고, 유명 사이트에서 특별회원으로 우대하고 또 최신 한국영화를 무료 관람케 하는 등 여러 가지 보상을 기대해 볼만도 하였다. 하지만 도통 그런 얘기는 들려오지 않았다. 전혀 보상이 없지만 그렇다고 볼멘소리 마저 없었던 우리 엄마들 무한정 퍼주기였을 뿐이었다.

근래 우리 사회의 최대 위기는 도덕성 상실이다. 정치와 경제에 대해선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수월성만을 앞세워 다수의 낙오자를 당연시하는 교육현장, 조직의 보호를 위해 취약한 일원의 인권마저 유린하는 노동현장, 친인척에게 수장자리를 양위(讓位)하는 종교현장 등등. 비록 극히 일부일지라도 도덕성이 특히 강조되는 곳에서 백년대계를 책임지지 못하고, 다수의 권익을 지켜내지 못하고, 신앙적 양심으로 일관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안에 분명 양심과 도덕의 소리는 있으련만 그 소리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자본과 권력에 매여 자기 안의 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도덕적 불감증은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지난(至難)한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전 산업화 과정에서 여공(女工)들의 헌신 그리고 정보화 사회 및 IMF 극복과정에서의 모성애 등을 반추할 때, 그 과제의 극복이 비록 어렵겠지만 불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자신한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우리 여성들이 또 한번 우리 안의 소리로서 우리를 정결(淨潔)케 해줄 것을 대망(待望)하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고 있다. 물론 아직도 작은 소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소리가 너무도 투명하여 점차 그윽한 현묘(玄妙)함을 가질 것이며, 분명 우리 모두에게 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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