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명사칼럼] 백남준과 유목민 문화

“짐이 곧 황화다”
脫정주민적 표현

 

백남준은 생전에 남다른 통찰력이 담긴 많은 글을 남겼다. 그 가운데 몽고 유목민에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다. 몽골 유목민은 기마 민족으로 두 가지의 중요한 소통방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문법이었는데, 이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해진 우랄 알타이어였다. 두 번째는 말(馬)이었는데, 이는 기마유목민의 속도 감각과 관련이 있다고 강조한다. 인류에게 말은 가장 오래된 이동 통신의 수단이자 전쟁의 필수 도구였다.

특히 몽고 유목민들이 개발한 ‘등자’는 고대의 전차 개념을 낳은 결정적인 발명품이었다. 등자는 말을 타고 앉아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간단한 물건으로 고삐가 필요 없이 상체와 손을 자유자재 움직일 수 있게 함으로써 전쟁 수행에 있어 말의 쓰임새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말과 인간이 한 몸이 됨으로써 단순한 교통 수단으로서의 말이 일종의 전차 혹은 강력한 미디어로 재탄생된 것이다. 실제로 등자는 비잔틴 시기를 거쳐 서양에 널리 전달됨으로써 전투 체계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그동안 동과 서를 잇는 문명 교류라고 하면 주로 ‘실크로드’를 지칭하였다. 이는 중국과 로마가 교통했던 정주(定住) 제국들 간의 교역에 불과한 것이다. 백남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거짓말”이라고 말하며, 정주민 역사를 정사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북방의 알려지지 않은 유목민의 문화와 정신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백남준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돌아보고 ‘동방견문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칭기스칸이 지배하던 몽골 제국의 오랜 세계통치 동안 법과 질서가 고스란히 유지되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몽골 제국의 특징은 단순한 정복이나 파괴가 아니라 우애와 연대의 네트워크였다는 것이 근래의 재평가들이다. 북방유목민 특유의 문화적 관용과 연대 의식 그리고 호방한 다문화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백남준 예술세계의 뿌리이자 원동력이었다. 60년대 초 독일에서 백남준은 플럭서스 운동의 창시자인 마치우나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짐이 곧 황화(黃禍, Yellow Peril)”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백남준이 ‘문화적 칭기스칸’을 염두에 두고, “짐은 곧 국가다”라고 했던 루이 14세의 말을 뒤집어 표현한 것이다. 정주민적 국가관에서 벗어나는, 그래서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창조성의 선구자라 칭할 수 있는 백남준식 표현이다.

우리도 해외 여행이 자유화된 지 2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디아스포라, 망명자, 유목민 타입의 삶의 방식에 눈뜨지 못했으며, 어떤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네이션=스테이트’ 안에서 처리하려는 구심력의 속성이 강하게 작동한다. 유라시아 초원을 종횡무진 달리던 북방 기마유목민의 속도가 동아시아 극단의 반도에 갇혀 거칠고 맹렬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의 역사와 현실이 아닌가 싶다.

18세의 나이에 반도에서 뛰쳐나가 동서 양방향으로 휘달렸던 백남준. 그가 살아있다면, 이 거친 소용돌이가 만들어내는 오늘 한국의 정주민 문화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정주민적 정체성에 대한 강박과 유목민적 DNA의 충돌, 이것이 우리가 백남준의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프로필

▶1957년 경기 동두천 출생
▶1987년 서울대 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전시기획부문·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8년 <나우 점프> 백남준아트센터 개관기념 ‘백남준 페스티발’ 총감독
▶2008년~현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계원디자인예술대학 매체예술과 교수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