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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집] ‘강화 화문석 문화관’ 속으로 GO! GO!

‘항몽’ 강화, 39년 왕궁문화 전통 계승
왕골 60만번 손길 ‘꽃돗자리’ 만들어
단순 실용품 아닌 화려한 수공예 작품
‘화문석 문화관’ 왕골공예 부활 신호탄

 


‘고려의 恨’ 화문석을 엮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은 단군 왕검의 신화로부터 5천년 한민족 역사 속에서 늘 그 중심에 위치해 민족의 흥망성쇠를 가름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영욕이 교차하는 역사 속에 비애와 한이 곳곳에 배어 있는 섬인 반면, 39년 동안 고려의 도읍으로서 최고의 왕궁 문화를 꽃피웠고 그 전통은 오늘까지 한국의 세계적 문화로 맥을 잇고 있다. 강화의 대표적 보물(?)이라면 팔만대장경과 인삼 그리고 화문석을 꼽는다. 이에 오늘까지 이어오는 강화화문석의 현재를 조명하고자 ‘강화 화문석 문화관’을 찾아보았다. <편집자 주>

화문석(花紋席)이란 무엇인가.

화문석은 말 그대로 ‘꽃돗자리’다. 흔하디 흔한 것이 돗자리고 더구나 중국산 돗자리가 싼 값에 유통되는 현실 속에서 짚풀로 만든 돗자리가 무슨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화 화문석은 일반 돗자리와는 그 용도와 문화예술적 가치가 다르다. 한마디로 실 생활에 쓰이면서도 예술적 가치를 지닌 창작품인 것이다.

화문석은 방동사니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 식물인 왕골(완초)을 재료로하여 만들어 진다. 왕골은 5월 말경 논에 심어 8월초에 수확한다. 키보다 큰 길고 억센 왕골을 베어내다 보면 왕골잎에 스친 팔뚝이며 정강이는 온통 상처 투성이가 된다. 이렇게 수확한 왕골은 3쪽으로 갈라 건조시킨 다음 다시 이것을 물에 불려 칼등으로 훑어 낸 후 왕골에 물감을 들여 고드렛 돌의 날실을 이용, 화문석을 엮게 된다.

보통 2~3명이 한조가 되어 60만번의 손질로 1주일은 족히 피땀을 흘려야 하나의 화문석 돗자리가 완성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문석은 여름철에는 시원하면서 땀을 잘 흡수하고 겨울에는 냉기를 차단해 포근함을 안겨준다.

특히 일반 짚풀 돗자리가 시간이 지나면 부스러지고 퇴색하는데 비해 왕골 화문석은 오래 사용해도 윤기가 나며 부스러지지 않고 은은한 고풍미를 더 해 화문석을 깐 집안의 품격을 높여 준다.

강화 화문석의 특징

강화 화문석은 타 지방에서 생산되는 돗자리와는 달리 왕골에 물감을 입혀 화려하고 정교한 무늬를 수놓아 엮는 수공예품으로 먼 옛날부터 왕실과 양반 가문의 장식 및 제례, 혼례와 가례 등 품격을 요하는 귀중한 자리의 바닥 장식용 귀중품으로 사용되어 왔다.

또한 사군자나 십장생 등의 문양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수놓아 때론 화사하고 때론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예술품으로 활용되었으며 현대에는 화문석, 화방석, 꽃삼합, 목걸이, 넥타이 대용, 기타 장식용품 등을 개발, 그 용도와 예술적 한계를 넓혀 나가고 있다.

어떻게 유래 되었는가

강화화문석이 언제부터 활용되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해 왔다고 전해질 뿐이다.

고려시대에 강화는 항몽을 위한 천도로 39년간 고려의 수도였으며 이때 왕실과 관료를 위한 최상의 돗자리를 만들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를 계기로 강화 화문석이 알려졌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왕실로부터 화문석 문양의 다양화를 요구 받고 어명에 의해 연구에 착수했다.

그 결과 당시 백색 돗자리를 생산했던 송해면 양오리의 ‘한충교’라는 분이 문양이 들어간 화문석 제작에 성공해 다양한 문양의 발전을 가져 왔으며 그 기술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어떻게 전수·보전되고 있는가

강화군은 민족의 문화유산인 화문석을 보전하고 그 장인정신의 맥을 잇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싼 돗자리에 밀려 제작을 기피하는 화문석 제조 기능자들에게 그 중요성을 깨우치고 제작 기법의 단절을 막기 위해 ‘장인’ 발굴과 지원책을 마련했다. 매년 왕골공예품경진대회를 열어 금년에 21회째를 맞았으며 제출된 제품들은 그 예술성을 인정 받아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또한 지난 2005년 11월 화문석의 시작점인 송해면 양오리에 지상 2층 규모의 ‘화문석 문화관’을 완공하고 체험장, 작품 전시실, 작업장, 화문석 역사관, 수장고 등을 갖춰 강화를 관광하는 내방객이 꼭 찾는 명소가 되었으며 잊혀져 가는 짚풀공예의 실습을 위해 전국에서 학생들을 비롯 남녀노소가 찾고 있다. 더구나 실용성 있는 다양한 왕골 수제품이 인기 몰이를 하면서 치장용, 전시용 등으로 주문 제작은 물론 내방해서 구입해 가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문화관 운영

화문석 문화관은 강화의 특산품인 왕골 공예의 부활의 장이 됐다. 그동안 힘든 육체 노동과 그에따른 경제적 실리가 없다는 측면에서 주민들이 제작 참여를 기피해 왔으나 최근에는 문화관에서 직접 제품을 만들며 내방객들을 맞이하고 있고 저마다 예술품을 만든다는 창작정신으로 거듭나고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하며 매일 아침 9시에 개장해 오후 6시 문을 닫는다. 문화관에는 문옥순씨와 허성자씨가 상주 근무하며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화문석과 완초공예에 대한 설명까지 상세히 들려 준다.

두분 다 왕골 공예 경진대회에 입상할 정도로 출중한 예술성향을 갖추고 있으며 직접 화문석 제작에 종사하며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작업과정의 애환과 작품성, 그리고 역사성과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실감나게 설명해 준다.

또한 문화관에서는 만18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매주 2회 3개월 과정의 수강생도 모집하고 있는데 수강료는 무료다. 이 외에 방문객들은 즉석에서 기초적인 짚풀 엮기 등을 배울 수 있어 학생들과 일반인 등에게 산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맺는 말

강화화문석 문화관은 개장 4년만에 완초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일한 문화공간과 예술 전시장이 되고 있다. 내방객들은 ‘돗자리 정도’로 생각하고 들렀다가 그 정교함과 예술성에 감탄하며 탄성을 쏟아낸다.

아기자기한 꽃삼합에 반해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주부, 호랑이가 금방 뛰쳐 나올 것 같은 화문석의 문양에 반해 가격을 흥정하는 남편, 다소곳이 앉으면 한 마리 학이 될 듯한 화방석 등 화문석이 일반 돗자리와 다른 점을 여실히 알고 가게된다.

그러나 아직 고쳐져야할 문제점도 있다. 화문석에 대한 제대로 된 책자도 갖추어지지 못하고 고작 간단한 홍보 팜프렛이 전부다. 차제에 양오리 일대에 왕골 재배단지를 육성한다던가 공예대전에 입상한 작품들을 서울 등 대도시 순회 전시 등을 통해 그 작품성과 실용성을 알리는 홍보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한걸음 더 나가 공중파 방송을 활용한 홍보 방안 마련도 좋을 것이고 국내 미술단체와의 교류를 통해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방안도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유일의 화문석 문화관이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의 호젓한 산비탈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복잡한 일상을 훌쩍 떠나고 싶을 때 전원풍경과 화문석 예술품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색 체험에 나서보는 것도 새로운 생활의 활력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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