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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칼럼] 존엄한 죽음과 존엄한 삶

존엄사 경제형편에 좌우 우려
공정기준 마련 희생양 없어야

 

한동안 존엄사 논쟁이 신문과 방송을 뜨겁게 달구더니 최근에는 잠잠해졌다. 언론의 주목을 받던 김모 할머니는 지난 6월 23일 인공호흡기를 떼어냈고, 곧 사망할 것이라는 우려와 달리 인공호흡기를 뗀 후에도 자발적으로 호흡을 하며 현재까지도 ‘생명의 박동’을 계속하고 있다. 김 할머니에 대한 판결이 있기 전까지 그동안 우리 대법원은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1997년에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입원환자의 부인이 경제적 이유로 퇴원을 요구하자 의사가 이에 응하였고 이로 인하여 의사와 환자 부인이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2004년 6월 24일 대법원에서 살인과 살인방조죄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일명 ‘보라매’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서 퇴원을 요청한 부인은 물론 의사까지도 처벌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대법원은 존엄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다. 2008년 1월에는 식물인간 상태인 아들의 인공호흡기를 떼어내 죽게 하여 살인죄로 기소된 아버지에 대하여 광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의 유죄판결이 선고됨으로써 역시 존엄사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법원은 이번 김 할머니 사건에 있어 존엄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했다. 대법원은 ‘의식의 회복가능성이 상실되어 더 이상 인격체로서의 활동을 기대할 수 없고 자연적으로는 이미 죽음의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회복불가능의 사망단계에 이른 말기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치는 것이 되므로, 생명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말기환자 스스로 자기 생명의 연장여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 이라고 판시하였다.

이번 대법원 판결 이후 치료불능 상태의 환자에 대한 존엄사 시행과 이에 대한 입법화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었고 존엄사를 허용할 경우 그 대상 및 연명치료 범위에 관하여도 많은 토의가 있었다.

회복불가능의 말기환자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것이므로 존엄사를 인정한 이번 대법원 판결은 타당한 것이다. 다만, 존엄사를 합법화할 경우 생명의 경시풍조가 더욱 심해질 위험이 크고, 더구나 말기환자 가족들의 ‘경제적 고통’을 이유로 존엄사가 남용될 우려도 없지 않다. 말기환자의 치료비용이 가정의 생계를 위협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하고 있는데, 이 때 자칫 환자의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말기환자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르기보다 가족의 경제적 형편에 의해 좌우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계와 법조계는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을 토대로 연명치료 중단의 자세한 지침을 만들어 제도의 희생양이 나오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존엄사의 시행에 있어 의학적으로 환자가 치료불가능한 중증 말기환자라는 의사의 확실한 진단이 있어야 하고, 환자의 사전 의료 지시서로 표현되는 환자 본인의 자발적이고 진지한 의사(意思)가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하며, 이를 공적으로 보장할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이제는 바야흐로 노령화의 시대이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이 세상을 떠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및 사회적 합의장치가 필요하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한걸음 한걸음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다. 너도나도 잘사는 법(well-being)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존엄한 인간으로서 다가오는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생과 아름다운 작별의 인사를 나눌 수 있어야 지금의 삶도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매일의 삶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실현될 때에야 이 세상을 떠나는 길이 초라하지 않고, 아름다우며 고귀한 것이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논쟁 이전에 존엄한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가을이 되길 소망한다.

프로필
▶1964년 전북 순창 출생
▶198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2006년 전주지법 부장 판사
▶2007년 인천지법 부장 판사
▶2008년~현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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