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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칼럼] 아름다운 퇴장

마라토너 이봉주 조용한 은퇴
20년 한우물… 끈기에 박수를

 

봄의 신록을 보며 즐거워하던 일이 어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다 지고 한 해가 가려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니 젊었을 때 무심히 지나쳤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 기쁨이자 아쉬움이다. 우리국민 남성의 평균 연령이 75세인 것을 감안하면 이런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초겨울을 맞으면 유난히 새봄이 기다려진다.

인생에도 몇 번의 봄이 찾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그럴 수 없으니 누구나 한 번만 맞게 될 인생의 가을을 잘 준비하여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올 가을은 강우량과 기온이 적절해서인지 유난히 가을 단풍이 고왔다. 이제는 수도권의 어지간한 공원에 가도 세월을 느끼게 하는 나무들이 뽐내는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또 단풍이 떨어져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걸을 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가을이 갈 때마다 나무처럼 필자도 남들에게 인생의 단풍과 낙엽을 선사하며 삶에서 조용히 퇴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10월 전국체전 마라톤 우승과 함께 조촐한 은퇴식을 치룬 이봉주 선수를 통해 필자가 평소 바라던 한 인간의 아름다운 퇴장을 보았다. 이봉주 선수의 은퇴가 아름다운 이유는 한국 마라톤을 대표하는 또 다른 선수인 황영조 선수의 은퇴와 대비가 되기 때문이다. 황영조 선수가 과학계의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 마라톤 선수라고 한다면 이봉주 선수는 뢴트겐과 같은 노력파 마라톤 선수라고 할 수 있다. X선 발견자로 잘 알려진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은 아인슈타인과 같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지도 않았고 또 창의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남보다 오래 끈기 있게 실험에 몰입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당시 다른 물리학자들이 해 오던 음극선 실험을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연구한 결과 남들이 무심히 지나쳤던 X선을 발견하였고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뢴트겐의 경우 X선의 특허권을 얻어 큰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인류를 위해 이 발견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해 특허를 포기하였으며 여러 직위를 마다하고 평교수로 만족하며 일생을 마쳤다.

이봉주 선수 역시 뢴트겐처럼 장점은 별로 없고 짝발에 키도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는 마라톤 선수로서는 상당히 불리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세계 마라톤을 장악하고 있는 케냐나 에티오피아 선수들의 사슴 다리와 같은 가늘고 미끈한 다리와 비교되는 이봉주 선수의 근육질 다리를 TV로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방콕과 부산 아시안게임 마라톤 연속 우승,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은메달을 딴 것을 보면 선수로서의 그의 끈기와 노력을 짐작하고도 남게 한다.

이봉주 선수의 퇴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재주가 있어 인기를 얻을 수만 있으면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딴 일에 한눈 파는 자칭 전문인들이 무수히 많은 우리사회에서 20년간 성실히 마라톤이라는 한 일에만 몰입해 온 사람을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웃 일본에서 노벨 화학상, 노벨 물리학상 등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 배출될 때마다 이봉주 선수가 생각나는 이유는 우리 과학계가 아직 이봉주 선수와 같이 제자리에서 자신의 과학을 고집하고 연구하는 끈기 있고 근성 있는 과학자를 키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곳곳에서 이런 사람들이 중심을 잡아주고 사회가 이들을 존경한다면 소득 2만 불을 뛰어넘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닐까? 지금도 제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낸다.

프로필
▶1954년 전남 광주 출생
▶1990년 美캘리포니아대학 물리학 박사
▶1990년~현재 아주대학교 자연과학부 교수
▶2006~2008년 아주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장
▶2007년~현재 한국물리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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