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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집] 항전의 역사 간직한 강화 성곽

고려 고종 19년 몽골 침략 피해 강화 천도 전후 축조 추정
저항 근거지 없애려는 몽골요구로 헐린 후 조선때 축성
2012년까지 633억원 투입 성곽 7천92m 복원 계획 착수

 


역사 탐방로 따라 ‘王都 숨결’ 다시 흐른다


조선반도 어디인들 뼈아픈 통한의 설움이 배이지 않은 곳 있겠냐마는 강화도만큼 단군 시조의 설화로부터 외세의 빈번한 침략에 항전하며 피로 얼룩진 역사 현장을 간직한 곳은 드물다.

역사 속에서 국난을 피해 왕권을 보위코자 왕도(王都)가 되면서 궁궐을 중심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방책이 세워진 바, 강화산성과 강화중성, 강화외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간직한 채 강화 읍내를 둘러싸고 있다.이에 강화주민들이 성곽을 따라 돌며(성돌이) 원혼을 달래고 안정을 기원했던 그 피맺힌 강화성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복원 계획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강화에 성을 쌓게된 이유

강화도에는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는 정족산성이 있다. 이 성은 고조선 시대에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이 성에 대해서는 논의를 생략하고 강화읍(옛 궁궐)을 중심으로한 성에 대해서만 살펴보고자 한다.

강화도는 역사 속에서 2번의 수도가 되는데 한번은 고려 때고 한번은 조선 시대다.

고려 때는 몽고의 1차 침입 후인 1232년(고종 19년) 몽골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최우의 주도로 고려왕조가 천도해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기까지 38년간 고려의 수도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제16대 국왕인 인조(1623~1649 재위)에 의해 왕도가 되는데 이때는 후금이 1627년 군사 3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정묘호란)하자 중신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련 없이 강화도로 천도해 강화는 왕도가 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강화는 역사 속에서 나라가 위급할 때 제2의 수도로 정해져 있었고 이에따라 궁궐 즉 왕권을 보호하기 위한 성이 축조될 수밖에 없었다.

강화산성

강화산성은 강화읍 관청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강화군청을 비롯하여 강화경찰서·강화우체국·고려궁지·강화향교 등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말하는데, ‘강화내성’이라고도 부른다.조선시대의 강화내성은 동서남북문과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남장대·북장대가 있었다. 현재 서문[瞻華樓]·남문[晏波樓]·북문[鎭松樓], 동문[望漢樓]은 모두 복원된 상태다. 내성의 둘레는 7천122m, 높이는 3m 내외이고 너비는 4m 내외다. 내성 축조에 대해서는 ‘고려사’에 아무런 기록이 되어 있지 않지만 강화에 궁궐을 짓기 시작하는 1232년을 전후해 동시에 축조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강화의 성곽은 1259년에 몽골의 요구에 의해서 모두 헐리게 되는데 이는 몽골이 고려의 저항 근거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이후 조선 숙종36년, 1710년에 이르러서야 현재 규모와 같이 남산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산성을 계획하고 시행해 7.1km에 이르는 현재의 강화산성 존재하게 됐다.

강화중성

강화중성은 역사 문헌에 나와 있었으나 명확한 지점을 찾지 못한 채 개략적 위치만 전해 왔으나 지난해 강화중성터를 최초 발굴해 학계의 주목을 끌며 고려시대 축성술을 밝혀내는 계기가 돼 토성의 축조과정을 재현해 냈다. 강화중성은 강화읍 월곶리·대산리·관청리·남산리, 선원면 선행리·창리·신정리 등 1읍 1면 7리를 통과하고 있다. 강화중성은 옥창돈(옥림리 125번지)에서 출발해 강화내성의 북장대까지, 강화내성의 남장대에서 출발해서 남하해 현재의 선원면 냉정리 찬우물 휴게소에서 꺾어져 도로를 가로질러 산으로 연결돼 대문고개를 관통해서 선원사 뒷산 등성이를 따라 흘러 가리산돈대와 갑곶돈대 사이 외성의 한 지점과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길이는 옥창돈에서 북장대까지 약1.8km, 남장대에서 가리산돈대와 갑곶돈대 사이 외성의 한 지점까지가 약 6.3km로서 총8.1km에 달한다.중성은 최항 집권기였던 1250년 8월에 축조되었는데 이것은 내륙을 점령한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해 해안을 방어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에 외성을 우선 축조하고 중성을 늦게 축조했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중성은 1259년에 몽골의 요구에 의해서 모두 헐리게 됐다.

내성과 외성에 대한 여러 학설이 있는데 하나는 1250년 강화중성을 처음 축조했으며 규모는 2천960간에 대·소문이 17개였다는 설이며 또 한가지 설은 중성의 규모가 2리 13정 30칸의 토축으로 조성됐다고 전해진다. 선학들의 이러한 학설은 육군박물관 조사단의 실측내용과는 다르다. 실측 결과에 의하면, 강화중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됐던 강화내성의 좌우 날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이 분분한 학설에 둘러싸여 있는 강화의 3성, 특히 중성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정밀조사와 세밀한 문헌자료 분석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강화외성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고종 20년(1233) 해안 방어를 위해 적북돈대로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걸쳐 쌓은 성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고종 24년(1237)에 강화외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비상시에 국왕의 피난처인 도성(都城)의 외성(外城)으로 광해군 10년(1618)에 보수하여 사용했다. 그러다가 숙종때 병자호란기(1636)에 허물어진 외성을 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고 돈대(墩臺)를 설치했다. 그리고 영조때 강화유수 김시혁(金始爀)이 비가 오면 성의 흙이 흘러내려 이를 막고자 중앙에 건의해 영조 19년(1743)에서 이듬해에 걸쳐 벽돌을 이용하여 다시 쌓았다고 한다.

맺는 말

강화군은 강화읍을 중심으로 남산과 북산의 능선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진 강화산성을 2012년도 까지 633억원을 투입해 성곽 7천92m를 복원할 계획이다. 아울러 탐방로와 산정상에 남장대와 북장대를 복원해 명실공히 왕도로서의 풍모를 회복할 것으로 기대된다.군은 강화산성의 효율적인 정비를 위해 지난 2008년도에 ‘강화산성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추진 중인 바, 성곽이 복원되면 역사유물의 관광지 뿐만 아니라 수도권 주민들의 걷기 코스로도 각광 받아 또다른 강화군의 자랑 거리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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