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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 하늘과 바다 속 아니라면 갈 수 있는 山 모두 올랐다

40여년간 국내외 3천여개 산 올라
‘한국의 1000 명산 견문록’ 집대성
교통편 산행코스 숙박정보도 수록

 

관동산악연구회 유정열(柳正烈·73) 회장. 그는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통틀어 무려 3천여 개 산을 넘었다. 그 높이에 따른 왕복거리를 환산해보라. 하심(下心)을 넘은 경지다. 그에게 물었다. 왜 산에 오르냐구. 그는 그냥 웃는다. “거기 산이 있어서냐, 아니면 산매(山魅)라도 들렸나”고 다시 물었다. 그는 호쾌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사랑이었어요.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싸주고 나를 포근히 안아주었죠. 나의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어요.” 묵묵히 서 있는 산(山)이 그냥 좋았다고 그는 말한다. 흔들리지 않고 마냥 수천 년, 수만 년 한 자리에 서 있는 산(山)에서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에게 산은 배움이고 철학이고 좌표이고 길이었다.

<유정열 관동산악연구회장>

지난 17일 오전 관악구 신림동 신원메트로빌 111호, 관동산악연구회 사무실(월드투어)에서 그를 만났다. 한 평생을 산과 함께 한, 산과 하나가 된 사연과 애환, 그의 인생역정을 들어봤다. 산악 관련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열정과 노력, 향후 집필 계획 등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그는 첫 인상부터 달랐다. ‘태양인’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1938년 무인생(戊寅生), 폐 기능이 발달해 ‘산악인’이 됐을 터, 생김새도 용맹스럽고 매우 적극적인 사나이 형(型). 그도 “태양인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산악인으로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연을 소개했다.

“1990년 초반 산악 관련 서적은 거의 없었어요. 당시 중앙 일간지와 월간 ‘산’에 등산 기행을 꾸준히 연재한 것이 인연이 됐죠, 그 첫 결실이 ‘초보 길잡이’라는 일본 책을 번역한 것이었구요. 이어 1995년 ‘우리 산 길잡이(성지출판사)’라는 책을 펴냈죠. 산악 분야에 새 지평을 열은 셈이죠.”

이 책은 당시 20만부가 팔렸다. 경이적인 판매 부수다. 관련 서적이 고작 3권이 전부인 시절, 기존 서적의 2배나 많은 180개 국내 산을 소개함으로써 기염을 토한 것이다.

내친 김에 350명산(2005)이란 책을 내놓아 5만부를 판매했다. 이후 ‘한국의 산 여행(2006)’, ‘한국 600명산 탐방기(2008)’, ‘한국 800명산 탐방기(2009)’를 잇따라 펴냈다. 언론 매체마다 ‘한국의 산악도감’이란 찬사가 쏟아졌고, 전국 대형 서점에서 50만부 이상의 판매 부수를 올리며 산악 서적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 했다.

그는 최근 필생의 역작인 ‘한국 1000 명산 견문록’을 펴냈다. 40여년 등정 기록의 산물을 한 권의 책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등반 경험을 인생살이에 녹아있는 철학과 정서를 담아 마치 기행 수필처럼 아련하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썼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무려 한국의 1천개의 명산에 대해, 교통편과 산행코스, 산길 탐방은 물론 문화유적, 주변에 가볼만한 곳, 먹거리, 숙박 연락처까지 최신 정보까지 수록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감성, 치열한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견문록이다. 수십년간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보고 들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토해낸 역작이기에 등반기가 아닌 견문록으로 펴냈다고 그는 말한다.

특히 등산 경로에 대한 의례적인 도식 나열은 과감히 배제한 채 그 산에 얽힌 유래와 역사, 문학과 철학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하며 ‘산을 보는 눈’을 새롭게 제시했다. 책을 출간할 때 감격스런 에피소드도 털어놨다.

“책을 낼 때마다 독자들이 격려와 성원에 힘을 더 받았어요. 어디를 가도 내 얼굴을 알아보곤 사인공세로 길이 막힐 정도였죠. 새삼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것을 실감했어요. 심지어 일부 독자들은 ‘세익스피어, 루소, 칸트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뤘다’고 극찬을 했어요.”

집필의 그 힘든 과정도 이런 성원 덕에 쉬 녹아내렸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의 책은 산악인은 물론 유명 정치인과 교수, 고위 공무원들의 선물용으로 인기몰이를 한다. 보통 이들의 주문량이 100권, 1천권 단위다. 이 책의 가치를 웅변한다.

그런 그에게 “그간 책을 내서 돈방석에 앉았냐”고 물었더니 해괴한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 산 길잡이’는 선풍적 인기였는데 돈을 못 벌었어요. 출판사만 좋은 일 시켰죠. 인세는 고작해야 5% 안팎이죠. 이후 ‘600, 800, 1000명산 시리즈’도 엄청나게 팔렸지만 사실 적자였어요. 이유는 광고비에 더 많이 쓰여졌기 때문이죠”

그는 중앙 일간지에 5단 통 광고로 매일 내보냈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실제로 요즘 ‘한국 1000명산 견문록’도 1주일에 평균 200~300권 팔려 나가지만 그 판매고는 몽땅 광고비로 충당된다.

오히려 부족하다. 1쇄 인쇄비와 편집비, 교정비는 사재를 털어서 메꾸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돈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산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를 위해서’다. 그는 “재미로 집필하고 출간한다”고 말하며 환희 웃는다. ‘최고의 책을 만들겠다’는 그의 신념이 깔려 있다.

이런 ‘베품의 기행(奇行)’은 그의 인생역정에서 비롯된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실화다. 그는 경남 진주시 금곡면 덕계 ‘골담’이란 사방이 꽉 막힌 깡촌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독한 가난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버티는 것만이 삶의 최고의 목표였다. 그 처절한 삶의 피폐 속에서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 열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런 슬픔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고교에 진학해 학업에 전념했다. 훗날 문학에 대한 열정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 그의 인생에서 최대의 시련이자 전환점이 찾아 온다. 조혼 풍습에 따라 열 아홉 살에 아버지의 강권에 못이겨 장가를 들었는데 아내가 죽도록 싫었던 것이다.

“전통 결혼식이라는 것이 TV나 영화에선 화려하고 재미난 일일지 몰라도 내가 주인공이 돼 치르는 결혼식은 비극이었죠. 결혼식에서 처음 만난 신부, 얼굴을 덮어 씌운 가리개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신방에서 밤이 깊어져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호롱불 아래에서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울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는 칠흙같은 그믐 밤 30리 어둠을 뜷??이웃 고모댁으로 도망쳤다. 며칠 후 아버지의 설득으로 집에 돌아왔지만 아내와의 정은 털끝만치도 생겨나지 않았다. 무늬만 결혼생활이었다. 그가 대학도 포기하고 군대를 자원한 것도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해서였다. 그는 제대 후 진주시청 서기보로 공직을 시작, 74년 서울시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겨 95년 정년 7년을 남기고 동작구교육청에서 사무관으로 명퇴할 때까지, 아니 나이 일흔 셋인 지금까지도 아내와 한 집에 같이 살지만 평생 각 방을 쓰고, 밥 한 번 같이 먹어본적도, 살갑게 이야기 해본 적도 없다. 그가 산을 찾게 된 사실상의 이유다.

“아내와는 동갑입니다. 햇수로 55년을 부부로 살지만 남남이죠. 어쩌면 아내에 대한 사랑을 산이 대신했는지 모릅니다. 후회는 없어요. 이것도 내 운명이고 팔자라고 생각해요.”

명퇴 이후 그는 자유인이 됐다. 그를 얽매이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시간도 충분하고 오랜 공직 생활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등산으로 다진 체력은 20대 청년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이때부터 세계로 눈을 돌린다.

“킬리만자로를 포함한 아프리카 10개국, 안데스산맥 최고봉인 아콩카과사노가 남미 7개국, 백두산,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30여개국 전 세계를 누볐어요. 질풍노도와도 같았죠.”

그는 명퇴 이전 이미 국내 1천여 산을 등반했다.

“40여년 간 국내외 3천여 개 산을 올랐어요. 일가친척 애경사도 모른 채 주말은 물론 시간만 나면 홀홀단신 배낭 하나 짊어지고 다녔죠. 하늘과 바다 속이 아니라면, 두 발이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올랐어요.”

그는 지난 9월 추석 때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의 5천m 베이스캠프까지 등정했다. 일흔 셋의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설악산, 지리산은 무려 100번이 넘게 등정했다. 설악산 울산바위 전설도, 태백산 ‘당골’, ‘점장이골’도, 마니산의 ‘양반길, 상놈길’도 모두 그가 이름 붙였다. 일찍이 노산 이은상(1903~1982) 선생이 생애 절반 이상을 강산순례에 바쳤고, 문학작품의 절반 이상이 강산순례에서 얻어진 것처럼 유정열 회장도 그렇게 살았다. 이은상 선생이 ‘설악 행각’을 노래한 것처럼 그도 1천개 명산의 산봉우리 봉우리마다 사랑과 사연을 남겼다.

그는 요즘 세계여행기를 집필 중이다. 종횡무진 누볐던 자신의 발자취를 써내는 작업이다.

“서점에 가면 세계여행에 관한 책들이 수도 없이 넘쳐나지만 그 어떤 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이고 참신한 책을 낼 것이다. 내 모든 인생의 경험을 이 책에 녹일 것이다.”

그는 산 인생을 이렇게 정리한다.

“어느덧 70을 넘겼어요. 나는 한자리에 머무르지 않아요. 살아온 인생을 추억하고 내게 주어진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젊지요. 오늘도 내일도 나는 새로운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구매문의 02-877-3000, 02-88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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