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리더]‘화성지기’ 양재섭 수원 고등동장

“화성사업소에서 남은 공직 마무리 소망… 운명같이 느껴져”
문헌따라 ‘성곽에 깃발 꽂는 역사적 설치예술’ 찬사 쏟아져
수원성→화성으로 제이름 찾기 혼신의 힘 85년만에 되찾아

 

대왕 정조(1752~1800)가 세운 세계 첫 계획도시 수원 화성(華城).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지도 벌써 햇수로 15년. 정조는 조선을 문화국가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바쳤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그 역사, 정신, 문화를 제대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가. 문화와 역사가 앞선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은 바로 국민 개개인의 ‘문화지능’(Culture Intelligence)에 달려 있지 않는가. 특히 공직자의 ’문화지능‘이야말로 어떠한 비즈니스보다 파급력이 크다. 양재섭(54) 수원시 팔달구 고등동장. 그의 지난 35년간 공직 생활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문화를 통해 길을 묻고 비전을 제시하는 그의 숨은 노고와 열정에서 배워야 한다. 새해 첫 날인 1일 오전 고등동 주민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 도시 역사는 매우 중요해요. 특히 수원 화성은 천재 군주가 세운 유토피아죠. 이 도시가 품은 역사 스토리만큼 더 강한 경쟁력은 없어요. 이제 그 몫은 우리 거예요. 성곽 500m 이전 차에서 내려 파킹하고 걸어서 둘러봐야 해요. 쉽게 와서 쉽게 보고 가면 쉬 잊어버리기 때문이죠. 역사는 체험이예요. 왜 ‘답사(踏査)라는 말을 쓰겠어요?

“제가 뭘 했다고 인터뷰를 하나요. 벌써 오래된 업무이고요. 정말 당황스럽네요”

양 동장의 인터뷰는 이렇게 손사래를 치는 것에서 시작됐다. 황당한 듯 그는 연신 “할 얘기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차를 마시며 20여분이 흐른 뒤에서야 어렵게 말 문을 열었다. 그는 차곡차곡 오려서 붙여놓은 몇 권의 스크랩 북을 넘기면서 과거를 회상했다. 당시 그의 일상과 의지가 스크랩 북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1995년 5월, 수원시 성곽관리사무소(現 화성사업소)로 발령났어요. 건축직 6급인데 보직도 없는 계장이었죠. 시 회계과 영선계장(현 청사유지관리계장)에서 하루 아침에 한직으로 쫒겨났죠. 남들은 좌천이라고 했지만 제겐 그때부터 공직의 존재와 의미을 찾게 됐어요. 대반전이랄까요. 2002년 2월까지 만 5년간 성곽을 지켰죠”

그는 수원 화성(華城)에 관심을 갖게된 입문 과정부터 설명했다. 5년여 짧지 않은 세월. ‘화성지기’로 애칭이 붙은 것도, 일복이 터진 것도 그때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성곽에 깃발을 꽂은 거에요. 정조 이후 처음이었죠. 성을 빙 돌아가면서 목화토금수 오행사상에 맞춰 각 방향마다 색색의 깃발을 꽂았죠. 동서남북을 파랑, 흰색, 빨강, 검정색으로 표시했고 가장 한 가운데 토(土)에 해당하는, 즉 정조가 있는 곳에는 노란색의 깃발을 꽂았죠”

그가 문헌에 따라 복원한 것이다. 그 이전만 해도 성곽은 썰렁했다. 깃발을 꽂는다는 생각은 아예 엄두도 못냈다. 깃발을 꽂은 이후 화성을 둘러보는 사람마다 찬사가 쏟아졌다. 정조 당시에는 이 노란 깃발이 100리 밖에서도 보였다. 이 장엄한 역사적 설치예술을 200년만에 그가 부활시킨 것이다.

사재를 털어 ‘화성을 찾아서’란 148쪽의 책을 발간한 것도 그때. ‘화성(華城)’으로 85년만에 제 이름을 찾은 것도 그의 힘이 컸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수원성(水原城)’으로 왜곡된 이름을 되찾는 데 그는 정말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당시 문화원장 출신인 심재덕 시장이 ‘이름을 되찾자’는 의지가 대단했어요. 이에 힘입어 향토사학자의 고증과 문헌을 통해 성 이름 왜곡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학술대회를 열고, 시의회 안건으로 상정해 경기도를 거쳐 문화재관리국에 명칭변경을 건의해 이뤄졌지요. 가히 범시민운동을 일으켜 관철시켰다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이어 1999년, ‘화홍문화제’를 ‘수원 화성문화제’로 개칭했다. 지방 일간지와 주간지에 이를 시정하기 위한 컬럼을 꾸준히 연재하면서 여론을 모으고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화홍문은 길이 5천520m 성곽에 산재된 48개 시설물 중의 하나인데 ‘화홍문화제’로 축제를 벌이는 건 문제가 있었어요. 정조대왕의 웅대한 꿈의 실천도장이었던 효원의 성곽도시를 스스로 격하시킨 것이죠. 그래서 수원화성으로 제 이름을 찾자마자 이 운동에 다시 불을 당겨 결국 제36회 때부터 ‘수원 화성문화제’로 개칭한 거죠”

이 즈음 수원시 상징물도 모두 바뀐다. 은행나무는 소나무로, 철쭉에서 진달래로, 비둘기에서 백로로 바꿨다. 특히 대표 상징물을 ‘화성’으로 추가 지정했다.

특히 ‘화장실 문화’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킨 것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고인이 된 ‘미스터 토일렛(Mr.Toilet)’, 심재덕 前 수원시장이 훗날 ‘세계화장실협회’를 창립하게 된 ‘영감’을 얻은 것도 바로 이때, 그에 의해서다.

“97년, 수원화성(華城)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심 시장께서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니까 성곽 주변에 화장실을 지으라고 지시했어요. 당시 화장실 4동(棟)에 대한 예산이 책정됐는데, 제가 이 예산으로 2동(棟)만 짓겠다고 시장께 말씀드렸어요. 유지관리비가 거의 안드는 ‘응접실 같은 화장실’을 만들겠다고 했죠. 처음에는 펄쩍 뛰셨지만 찬찬히 제 얘기를 듣고 나서는 OK를 하셨어요”

그는 장안공원 화장실과 팔달산 입구의 화장실 2동을 설계해 바로 공사에 들어갔다. 3.3㎡당 450만원. 최고급 빌라보다 더비싼 ‘호화 화장실’을 지었다. 냉난방은 물론 자동센서와 장애인화장실 칸 까지 갖춘 ‘완벽한 화성(華城)화장실’을 지었다. 외관은 성곽의 이미지와 어울리게 기와를 올렸다. 20년이 지나도 끄덕없게끔 완벽한 화장실을 만들었다. 세면기도 변기도 반영구적이면서도 세련된 것을 썼다. 완공 후 결사반대하던 이웃 주민들이 집 화장실은 이용치 않고 줄지어 성곽 화장실을 이용했다.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나 의회에서는 ‘예산낭비’라며 난리법석을 폈다.

“완공하자마자 당시 모 시의원이 저를 불러 호통을 쳤어요. 개인 호화주택을 지어도 3.3㎡당 200만원인데 이보다 2배가 넘는 화장실을 지었냐고 ‘당장 설계도면을 갖고 오라’고 하더군요. 설명해도 막무가내였어요. 하는 수 없이 ‘설계도면’을 갖다주고 나서야 진정됐어요.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죠”

수원 도심의 화장실이 일대 개혁을 꾀하게 된 계기다. 화성을 빙돌아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화령전(華寧殿) 운한각 취두박이’도 한 사례다. 화령전(華寧殿)은 사적 115호, 정조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인데 내부 운한각(雲漢閣) 남측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주술의 방편으로 용마루에 박혀있던 이 ‘취두박이(鷲頭鐵針)’를 1999년 운한각 번와 공사 때 사진촬영을 해뒀다. 훗날 없어지면 그 사료적 가치로 고증해서 재복원하기 위함이었다. 또 성곽 문루(門樓)에 소방서 고가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와 지붕의 잡초를 손수 뽑고 제초제를 주입했다. 자칫 중심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수원 화성의 5년은 그에게 잃어버린 ‘역사 복원’과 ‘역사의식’을 되살리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그가 지금 화성을 보는 아쉬움과 바램은 무엇일까. 성곽 시설물에 대한 견해부터 밝혔다.

“화성의 유지관리는 공사업자들에게 맡기면 엉망이 돼요. 원형이 훼손되죠. 이 분야의 건축을 공부한, 성곽에 애착을 갖고 있는 공무원이 맡아야죠. 학예사는 역사적 이론에 앞설지 몰라도 성곽 시설물에 대한 지식은 없어요. ‘공모’도 한 방법이 될 거예요. 의례적인 인사코스나 승진의 발판이 아닌 정말 화성을 사랑하고 보존할 정신과 이론무장이 돼 있는 사람이 배치돼야 해요.”

그는 적재적소의 인사 배치을 바라면서 화성 관람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고견을 내놨다.

“성곽을 너무 쉽게 이해하려는 게 문제예요. 성곽 500m 이전 차에서 내려 파킹하고 걸어서 둘러봐야 해요. 쉽게 와서 쉽게 보고 가면 쉬 잊어버리기 때문이죠. 역사는 체험이예요. 왜 ‘답사(踏査)라는 말을 쓰겠어요?’”

답답한 심경도 토로했다. “팔달문 양쪽 벽을 보셨나요?. 시커먼 돌이 푸석푸석해요. 배기가스 오염 탓이죠. 문화재도 너무 가깝게 다가서는 것도 안돼요. 훼손되죠. 너무 아쉬워요”

그는 역사를 ‘뿌리찾기’로 설명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끈’이라는 것이다. 그는 2000년 화성을 떠나서도 이같은 집념은 계속됐다. 그 사례가 광교산의 ‘수원천 발원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광교산에서 발원해 남북으로 흐르는 그 물줄기의 한 가운데 자리한 팔달산, 이를 주산으로 화성행궁을 세운 정조대왕의 그 심오하고 원대한 뜻을 기려서다. 그는 시에 아이디어 제안을 내놓고 뜻을 같이하는 동료 직원들과 길을 나섰다.

“수원시 승격 62년이 되도록 수원천에 대한 발원지를 몰라요. 스토리텔링의 자료가 없는 거죠. 수원시의 태생적 동기 발굴을 위해서였어요. 수원, 오산, 화성이 한 곳의 물로 시작돼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는 지역공동체임을 알리는 목적도 있구요. 수원의 모태를 찾는 거죠.”

지난 해 4월 발족해 10여명의 예비 답사조에 의해 이미 그 발원지를 찾았다. 곧 시가 나서 곧 국립지리원 측에 해발고도와 좌표 등 검증을 요구해 승인을 받을 예정이다.

그는 새해 1일자로 고등동장으로 발령났다. 고작 열흘 남짓한데도 벌써 여러가지 기획을 했다. 그 중 하나가 ‘쌍수정(雙水井)’ 찾기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쌍우물 터’를 찾아 마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구심점 역할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2009년 4월, 장안구청 건축과장 재직 때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를 입었다. 자전거로 퇴근하다가 도로 한 복판의 볼라드를 들이받는 대형사고가 났다. 몇 차례의 수술 끝에 그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하늘이 도운 거죠. ‘아,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했어요. 가족의 힘이 컸죠. 병상에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남은 공직 6년여, 정말 기회가 주어진다면 ‘화성사업소’에서 마무리하고 싶다는…. 제 운명같이 느껴졌어요.”

사경을 헤매는 병상에서도 ‘수원 화성(華城)’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도시 역사는 매우 중요해요. 특히 수원 화성은 천재 군주가 세운 유토피아죠. 이 도시가 품은 역사 스토리만큼 더 강한 경쟁력은 없어요. 이제 그 몫은 우리 거예요”

한 나라의 행동을 관장하고 문화적 행위를 선도하는 입장에 있는 공무원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양재섭 동장은 웅변하고 있었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