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문화리더] 조유전 경기도박물관장

무령왕릉 발굴 뼈아픈 경험 타산지석 …황룡사 지금도 발굴 중
고고학은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학문이죠
자기 족보 모르고 남을 평할수는 없어…문화유산 먼저 알아야

 

■ 경기박물관 ‘정신문화 허브’문화 유산으로 정체성 확립

고고학, 그것은 발굴이란 작업을 통해 사라진 과거의 역사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는 학문이다. 드러난 유적과 유물은 생명력을 얻음으로써 비로서 역사적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진다. 조유전(趙由典·70). 그가 바로 이런 역사의 뿌리를 찾는데 평생을 몸바쳐 온 국내 고고학계 최고의 석학(碩學)이다. 지난 1971년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 경주 황룡사, 월성, 감은사, 익산 미륵사지, 러시아 수추섬의 신석기유물 발굴 등이 그가 이끈 대표적 고고학 발굴 사업이다. 그는 현재 경기문화재단 부설 경기문화재연구원장 겸 경기도박물관장이다. 햇수로 3년째다. 공직은 이미 지난 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런데도 경원대 강사(2002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초빙교수(2004~2006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장(2006~2009년), 문화재청 민속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2007년~현재), 남한산성운영위원장(2009년)을 두루 거쳤다. 40여년의 ‘두더지 인생’에 대한 ‘몸값’을 톡톡히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해에는 한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발굴 답사기를 묶어 ‘한국사 기행(책문)’도 펴냈다. ‘한국사 미스터리(2004년)’, ‘발굴이야기(1996년)’에 이은 자신의 8번째 고고학 대중서이다.

그로부터 한국의 발굴 역사와 애환, 에피소드, 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인식, 그리고 2011년 경기도박물관의 사업계획을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달 27일 오전 10시 용인시 기흥구 상길동 경기도박물관장실에서 이뤄졌다.

첫 인상부터 구수했다. 칠순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자상하고 토속적인 학자 스타일이었다. 국내 고고학계의 ‘거목’인데도 2시간여 인터뷰는 마치 막걸리를 대작하며 지나온 인생이야기를 들려주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달변이었다. 그 오래된 발굴의 기억을 실타래 풀듯 술술 풀어냈다.

“고고학이 꿈이었냐”고 물었다. 이 분야 국내 최고 유명 인사라 가벼운 신상부터 물었다. “법대 진학에 두 번 낙방해 삼수 끝에 선택한 것이 고고인류학이었죠. 인생 진로가 바뀐 거죠.”

그는 경남 마산고 출신이다. 서울 법대에 두 번 응시했지만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1962학번이다. 당시 전체 과원은 10명.

“1회 선배 10명 중 5명은 교수가 됐지만, 우리 2회는 7명만이 졸업했는데 모두 공직의 길을 걸었어요. 성공했다고 봐야죠. 그런데 2회는 죄만 짓고 살았어요.” 그의 느닷없는 ‘죄인’이라는 표현은 발굴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이었다.

본격적인 그의 발굴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의 최대 업적인 1971년 백제 무령왕릉 발굴부터다.

“그때 생각만하면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요. 그때 그만뒀으면 멍에를 쓰지 않았을 건데…. 한 길로 와서 이제는 고고학, 현장발굴하면 저를 추켜세우지만 늘 후회스럽죠. 발굴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왕릉인 것을 알고 하룻 밤새 발굴을 끝낸 거죠. 유물 수거작업에 지나지 않은 거죠.”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 발굴사에서 커다란 오점을 남긴 것으로 회자된다. 체계적인 준비없이 왕릉 발굴을 하룻밤만에 해치운 일은 씻을 수 없는 실수였다.

“보도진에게 먼저 왕릉 내부를 공개한 것도 고고학 발굴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오늘날 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는 거죠. 임금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면서도 후회스럽죠. 고고학을 정통으로 배운 사람들이 그렇게 졸속발굴을 했다는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지요. 궁극적 책임은 단장에게 있다할지라도 참여자로서, 조사원의 심부름꾼이었다도 해도 모두 공동체이기 때문에 반성해야죠.”

지금의 국립공주박물관이 무령왕릉박물관이다. 당시 우여곡절 끝에 이 출토 유물들을 서울로 갖고 와서 뒷 마무리를 마친 후 공주박물관으로 다시 옮겨갔다. 당시 이곳에서 출토된 ‘무령왕 지석(誌石)(국보 제163호)’은 우라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아니라 삼국시대의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또 오수전, 석수, 왕과 왕비가 착장했던 장신구류와 부장 유물, 동제 발(鉢), 동제 접시, 동탁 은잔, 동제 수저 등 모두 108종 2천906점이 발굴됐는데 이중 국보가 12건에 이른다. 무령왕릉의 졸속 발굴은 이후 발굴 방법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기폭제가 됐다.

“1973년 천마총 발굴 땐 모든 조사원이 유니폼을 입고 동거동락하면서 발굴 했죠. 이어 황룡사 발굴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황이고, 감언사, 안압지도 계속 발굴 중이죠. 무령왕릉 발굴의 뼈아픈 경험을 타선지석으로 삼은 거죠.”

그는 이런 발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묶어 1996년 국립민속박물관장 재직 때 ‘발굴이야기’란 책을 펴냈다. 경주 신라무덤 가운데 광복 후 최초로 발굴(1946년)된 호우총(壺盂塚) 이후 1996년까지 50년, 발굴반세기의 100대 발굴을 이야기 식으로 출간한 것이다. 베스트셀러였다. 불티나게 팔렸다.

그는 고고학자로서의 ‘발굴’에 대한 아픔도 토로했다. ”당시까지는 100대 발굴이었죠. 그런데 이후 급속도로 도시개발 붐이 불며 1990년 후반에는 1년에 10건, 지금은 1천 건 이상 급속도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어요. 개발과 고고학은 상극이죠. 원수지간이죠. 개발이 없으면 발굴될 이유가 없는 거죠. 기록을 남겨야하니까 일일이 사람이 하는 거죠. 법적으로 발굴비를 정부가 댄다면 개발이 늦춰질 수 있지만 수익자 부담원칙에 따라 개발하는 곳마다 민원이 봇물치는 거죠.”

그는 개발은 ‘역사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개발을 멈추는 것만이 땅 속에 묻혀있는 유물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학술조사가 돼야 하는데 개발에 떠밀려 구제발굴만 하는 것이 한심스럽다고 한숨을 내쉰다.

“서울 사대문 안 3m 땅 밑은 과거의 흔적인, 유물이 그대로 쌓여 있어요. 예전에는 큰 사변이 일어나면 싹 쓸어버리지 않고 그 위에 다시 지었기 때문이죠. 경복궁 광화문도 마찬가지예요. 지난 청계천 재개발 때 조선 600년 역사가 땅 밑에서 무더기로 나왔죠. 서울 사대문 안 사람이 살았던 곳은 재개발만 하지 않으면 지난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할 거예요. 폼베이가 달리 폼베이인가요?”

그의 억양이 높아졌다. “도대체 자본주의 세상은 규제를 무조건 풀려고 해요. 문화재법은 규제의 법인데 정면 배치되는 거죠. 앞으로 통일되면 수도가 북쪽으로 올라가요. 그러면 구 시가지는 문화유산으로 남을 거에요. 서울 사대문 안 3할은 개발만 안하면 언제라도 조선의 역사를 그 땅 속에서 찾을 수 있어요.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개발을 미루고 ‘역사보존’을 신념처럼 강조하는 그에게 최근 도마 위에 올랐던 한국사의 선택과목 지정에 대해 물었다. (다행히 뒤늦게 항의가 빗발쳐 교육당국이 내년부터 필수과목으로 위상을 되찾게 됐지만).

“우리라는 개념을 생각해봐요. 우리 직장, 우리 나라, 그걸 묶어주는 게 역사예요. 역사는 우리의 뿌리죠. 슬픈 역사든 망국의 한을 품었던 역사든, 잘됐든 잘못됐든, 우리의 역사는 공동체로 묶어주죠. 그 역사의 바탕과 우리의 정체성을 만들어 주는 게 바로 문화유산이예요. 역사 교과서의 중요성은 나 자신을 먼저 알게 하는 것이죠. 자기 족보도 모르고 남을 평할 수는 없어요. 고고학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인류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학문이라는데 이끌려 이 길을 선택했다. 40년 외길, 이제 칠순을 넘겨 경기도박물관장이란 중책을 맡고 있다. 16개월여 지난 지금, 그는 경기도박물관의 야심찬 계획과 구상을 기획 중이다.

“올해는 경기도박물관이 재단으로 들어간지 3년, 설립된지 15년 째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반세기를 보는 새로운 각오로 스탭들과 머리를 짜고 있어요. 지난해 전문가를 초청해 대담하고, 공청회 세미나를 열어 큰 줄기를 잡았어요. 아마 2~3월 중 뼈대가 정해지는대로 확실한 목표와 비젼을 세울 겁니다. 특히 2018년이 ‘경기(京畿)’라는 말을 쓴 지 1천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도민들이 자긍심을 갖을 수 있도록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는 경기도박물관이 경기문화의 허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을 키워주기 위해선 문화가 앞서야 하고, 문화가 있으면 관광은 저절로 된다고 강조했다. 관광을 앞세우는 것은 넌센스이고 문화의 보고는 박물관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박물관이 제대로된 역할과 기능을 갖추기 위해서는 고고학 발전이 전제돼야 한다며 고고학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곤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 역사가 최소 30만 년 전 아득한 구석기시대부터 출발했다는 사실을 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있죠. 고고학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업그레이드 한 것이죠.”

고고학이란 학문의 위상이자 힘을 거듭 역설한 것이다. 단군신화도 이젠 신화가 아닌 실제로 인정하지 않는가. 그는 수천 년 수만 년의 선사시대의 실체를 눈 앞에 펼쳐 규명하는 학술 작업이 고고학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약 력

▶학력

- 1960년 경남 마산고 졸업

- 1966년 서울대 문리과대학 고고인류학과 졸업

- 1980년 단국대학교 대학원(선사고고학 석사)

- 1987년 동아대학교 대학원(역사고고학 박사)

▶경력

- 1970~1978년 문화재관리국 학에연구사 학예연구관

- 1982~1990년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 1987년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

- 1988년 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연구실장 및 문화재전

문위원

- 1989~1993년 완도청해진유적발굴조사단장

- 1994~1998년 국립민속박물관장

- 1998~1999년 문화재관리국 제4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 1999~2005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회 제3, 제6분

과위원

- 1999~2002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문화재청)

- 2004~2006년 동아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초빙교수

- 2006년~2009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관장 1급

(처장급)

- 2007~현재 문화재청 민속문화재분과 문화재위원

- 2009,3~현재 남한산성운영위원장 겸 경기문화재연

구원장

- 2009.11~현재 경기도박물관장 겸 경기도문화재연구

원장

▶저서

- 1990년 북한의 문화유산(공저)

- 1992년 한국선사고고학사(공저)

- 1996년 발굴이야기

- 1999년 고조선 문화연구(공저)

- 1999년 단군과 고조선(공저)

- 2004년 한국사 미스터리

- 2005년 백제고분 발굴이야기

- 2010년 한국사 기행(공저)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