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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단상] 백(百)번도, 천(千)번도 절을 드리고 싶은…

 

국가이든 가문이든 찬란한 결과의 뒤안길에는 반드시 몇 명의 영웅들이 있기 마련이다.

오늘이 있기까지 흔히들 이병철, 정주영을 빼놓지 않고 으뜸으로 치는데, 또 한 분의 주인공은 학원이란 잡지를 창간한 故 김익달(金益達) 선생이다.

‘학원’하면 70, 80세대는 아! 하고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김익달 선생하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분이 많으리라. 빈약한 서가에 ‘학원세대와 김익달’이란 제목의 책이 구석진 곳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김익달(金益達) 전기간행위원회 편’ 이렇게 주최 측을 밝혔는데, 사실 이런 종류의 위원회란 것이 참으로 묘하다.

년전(年前)에 좀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지탄 받던 사학재단의 이사장 겸 총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유수의 신문 하단에 큼지막하게 장례위원회 명의의 부고가 실려서 망자를 꼭 이렇게 범시민적으로 포장해야 하는지, 자기네들끼리의 잔치에 진정으로 슬픔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마저 동원해야 하는지…. 심사가 이상하게 뒤틀린 적이 있다.

하여간 이런 위원회란 대중이란 그럴듯한 포장으로 위장될 수 있지만….

김 선생의 전기간행위원회는 달랐다. 슬픔을 애도하는 색깔이 모두 동색(同色)이었다. 故 김익달 선생은 해방 이후 출판사를 차려 명심보감, 시조 5백수…. 이런 종류의 책을 출판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은 배고픔을 이기는 것이 급선무인데 왠 명심보감에 시조라니…. 그 뒤 나라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던 1952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학원이란 잡지를 발간한다. 아직 일선에서는 포연(砲煙)이 자욱하고, 거리는 온통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 가장 급했을 때….

당시 ‘학원’이 나올 때는 우리나라에는 단 한권의 잡지도 없었다. 이런 분을 우리는 선각자라 부른다. 요즈음 10만 부가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데 당시 ‘학원’도 그 숫자 이상 팔렸다고 하니 선생의 일대기를 읽고는 가슴이 뛰었다. 결국 오늘의 우리가 있기까지 선생의 혜안(慧眼)이 바탕이 되었다. 배고파 굶주린 사람에게 보석을 주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허기를 느끼는 사람에겐 밥을 주어야 진정한 도움이라 할 수 있다.

그 뒤 ‘학원문학상’을 제정해 지금 대부분 문단의 대가들은 학원을 ‘등용문’으로 삼았다. 황동규, 정공채, 이청준, 김주영, 김원일, 최인호, 황석영…. 일일이 거론하기에는 숨이 가쁘다. 그 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장학사업을 벌였다. 이름하여 ‘학원장학회’….

요즘도 돈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의무를 내세워 장학회를 운영한다. 우월감이든 세금회피든 정치인의 선린이든 어찌됐던 좋은 일이다. 선발 방법이 특이하다. 첫째 가정이 극빈한 모범생, 반드시 학교장의 추천이 있어야 하며 시골에서 상경하는 학생들에게는 왕복여비, 숙박비, 거기다 잡비를 보탰다. 세심한 배려!

장학금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 4학년까지 학비 전액 부담이었다. 나중에 출판가가 어려울 경우에는 직원들의 봉급을 늦추거나, 시중에서 높은 이자 돈을 빌려서라도 학생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고 하니 하여간 최초에 최고를 달고 다니는 분이었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대백과사전을 발간해 건국 10년 만에 당시만 해도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알려졌는데 떡하니!

1960년대에 어린이 신문의 효시(嚆矢)가 되는 새나라 신문을 발간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농원이란 잡지가 경영난으로 건강마저 크게 다친다. 참으로 인간으로 더욱 매력적인 점을 소개할까 한다.

남자가 세상에 태어나서 세 번 눈물을 흘리는데 그 중 하나가 어렵사리 집을 마련해 자기 이름으로 문패를 다는 것이라 한다.

주택난이 지금보다 훨씬 심각했을 때 직원들에게 집을 스무명 정도 넘게 사 주었단다.

당시 혹자는 고용인이 피고용인을 최대한도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도의 용인술이라고 했지만, 집을 얻은 분들이 회고하기를 김 선생이 집을 고르는 요령, 살 때 주의해야할 점, 등기 절차를 일일이 가르쳐 주고, 심지어 여러 날 집을 함께 보러 다녔다고 한다.

정공채 시인은 회고하기를 “존경의 절을 백번도 천번도 드리고 싶은 선생님!” 이렇게 흠모한다.

책을 사면 버릇이 구입 날짜를 표지 내지(內紙)에 기록하는데 91.1.31 참으로 꾸지람을 들을 일이다. 책을 읽은 이틀 동안 순수한 감동의 연속이었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김기한 객원논설위원 (前 방송인·예천천문우주센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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