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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공정한 사회’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영국의 인문학자인 토마스 모어다. 16세기 초, 그는 자기가 꿈꾸던 이상주의 국가의 모습을 ‘유토피아’라는 공상소설로 그려냈다. ‘유토피아’란 ‘이상적인 나라’라는 의미로 그리스어인 ‘ou(없다)’와 ‘topos(장소)’를 합쳐서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결국 ‘아무 데도 없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최근 열린 한나라당 최고위원회 만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생계형 픽업 차량들이 교통법규를 위반해서 내는 벌금과 벤츠 승용차 운전자가 위반해서 내는 벌금이 같은데 그것은 공정사회 기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똑같은 법규를 위반했어도 한 사람은 생계가 걸린 문제이고, 또 다른 사람은 그저 취미생활을 하다가 위반한 경우일 가능성이 높은데 같은 액수의 벌금을 내도록 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다.

이 대통령은 2009년 8월 국무회의에서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북유럽 국가들이 실시하고 있는 소위 ‘일수(日數) 벌금제(day-fine)’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이 제도는 범행의 경중에 따라 일수를 정하고 피고인의 재산 정도를 기준으로 산정한 금액에 일정 비율을 곱해 최종 벌금액수를 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벌금을 소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달리 부과해야 적절한 징벌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발상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소득에 따라 교통위반 범칙금을 차등 부과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여기서 말하는 ‘공정(公正)’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하고 올바름’이다. 이 말을 작년 광복절 기념연설에서 대통령이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정작 큰 틀에서의 ‘공정한 사회’는 온데간데없고, 고작 생계형 운전자에 대한 범칙금 경감이나 운운한다는 것은 왠지 옹색하기만 하다. 이들에게 범칙금 경감 혜택을 준다고 해서 이 사회가 공정해질 거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통령도 이를 ‘친(親) 서민’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낸 것이겠으나 아무리 후하게 쳐도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 옹색한 발상일 뿐이다.

이러한 발상이 대통령의 순정한 생각이라면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벤츠 운전자’에 대한 대통령의 ‘불편한 시각’이다. 벤츠를 탄다고 해서 할 일 없는 유한족(有閑族)으로 보려는 선입견부터가 이미 공정의 틀에서 벗어난다. 물론 부모 잘 만난 덕에 벤츠를 타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나름대로 성공한 위치에서 부와 명예의 상징과도 같은 벤츠를 몰고 다닐 것이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 벤츠를 탄다는 것은 적어도 성공한 이들이 당당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도 같다. 그런데도 벤츠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역차별을 당한다면, 그것이 공정한 사회라고 믿어달라면, 어디 그것이 가당한 일이겠는가.

‘생계형’인 사람들은 죽어라 일만하는데 늘 가난하다며 ‘워킹푸어(working poor)’를 원망한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이다. 이를 위해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로또대박을 꿈꾸지만, 현실은 언감생심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무슨 일에건 반드시 대가는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생계형 범칙금 경감은 자칫 사회적인 패배자를 양산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정한 사회는 공정하게 경쟁하는 사회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리가 질시의 대상으로 바뀌고, 경쟁에서 앞서가는 사람의 덜미나 낚아채려드는 사회는 이미 공정을 포기한 사회나 다름없다. ‘특권’에는 둔감한 청와대가 서푼짜리 민생이나 챙겨보자고 나선 것부터가 잘못이다. 공정과 동정을 혼동한 결과다. 그렇게도 공정한 사회가 소원이라면, 차라리 우리에게 공정한 사회는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양심적일 수 있다. /이해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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