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7 (수)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생활에세이] 엽서 한 장

 

3월, 어느새 주변에는 한껏 물오른 나무들이 푸름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가까운 천변을 걷다보면 겨우내 움츠려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이미 코 앞에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이제 머지않아 매화가 만발하고 목련은 신부의 순결한 웨딩드레스 자락 같은 잎들로 꽃불을 밝힐 것이다. 강가의 버드나무는 연둣빛으로 물들고 비비추 새싹은 마치 뿔처럼 힘차게 땅위로 솟아 봄이 왔음을 알린다. 이 모든 것들은 자연이 우리에게 어느 날 불쑥 건네는 봄 편지다. 그 봄 편지에 나는 또다시 소녀처럼 설렌다.

며칠 전, 초로의 시인에게서 엽서 한 장을 받았다. 한참이나 어린 내게 그분은 가끔씩 엽서를 보내곤 하셨는데 흰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시인에게선 풀냄새 같은 향기가 느껴지곤 했다. 그 분이 보내는 엽서는 언제나 특별했다. 항상 달력이나 잡지에서 오린 여러 가지 그림으로 엽서를 꾸미고 잘 우려낸 차와 같은 몇 줄의 글을 또박또박 써서 보내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 분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갓 시인으로 등단한 내게 앞으로 발표할 시들을 정리하라고 꽃 그림이 그려진 노트를 사준 일이며 차를 마시며 함께 나누던 대화, 눈빛들까지…. 아마 흰머리 고운 시인도 그 엽서를 만들면서 내 얼굴을 떠올렸으리라.

한때는 나도 누군가를 향해 매일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쓰노라면 어느새 시간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기 일쑤였다. 하지만 인터넷 메일을 사용하게 되면서부터 더 이상 손으로 쓰는 편지는 쓰는 일도 받는 일도 드물어졌다. 며칠씩 우체부를 기다리며 행여 내 편지를 못 받아본 건 아닐까 애타던 마음도 이젠 한 번의 클릭으로 상대가 내 편지를 받아보았는지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참 편리한 세상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손으로 적어 내려간 짧은 엽서한장이 인터넷 메일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 편지를 쓰는 이의 여유와 평온함이 글자를 통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첨단 과학은 우리의 일상을 현대적이고 세련되고 편리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현대적이고 세련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피폐해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느린 것을 참지 못하고 빠르게 생산해내고 빠르게 소비하고 빠르게 폐기해버린다. 기다림이나 여유를 찾아보기 힘든 이러한 양상은 사람사이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만나고 100일을 넘기기 힘들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만나고 잊히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순리라 해도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속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아날로그적인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속도에 발맞추기 위해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비단 우체통에 담긴 편지나 엽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시간에 순응하는 기다림, 그리고 작고 여리고 순한 것들을 보듬고 그들에게 동화하는 마음의 여유다. 나도 오늘은 잠시 짬을 내 누군가에게 또박또박 눌러 쓴 글씨로 엽서 한 장 적어 보내야겠다. 긴 겨울 보내느라 힘들었는데 어느새 사방에 봄이 왔다고, 여기저기서 꽃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고 말이다. /임봄 시인

▲ <애지> 등단(2009년) ▲ 한국문예창작학회 회원 ▲ 호접몽 동인 ▲ 고려대학교 인문정보대학원 석사과정 재학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