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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오해와 이해

 

‘오해’와 ‘이해’의 공통점은 문자적 의미로 ‘풀이한다, 해설한다.’의 뜻이다. 목적어를 연결시키면 ‘무엇을 해설한다. 혹은 무엇을 풀이한다.’ 뜻이다. 문법에서 대상과 서술어만 있으면 의미론상이나 문장론상이나 별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허전하다. 따라서 ‘오해’의 ‘오(誤)’와 ‘이해’의 ‘이(理)’는 매우 중요한 매김씨의 역할을 한다. ‘오(誤)’는 ‘그릇됨’이요, ‘이(理)’는 ‘이치에 합당한’란 의미로 접근하면 의미파악에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즉 ‘오해’는 ‘잘못 이해한 것’이요 ‘이해’는 ‘오해가 없는 것’으로 새겨보니 그럴 듯하다.

우리는 수많은 오해와 이해의 혼돈 속에 노출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저기를 보라 계수나무가 있잖나?’했더니 맞장구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계수나무는커녕 손금만 가득하다는 사람도 있다. 계수나무를 본 사람은 가리키는 사람의 생각까지 따라가는 수동적인 사람일 것이요, 손금을 본 사람은 가리키는 사람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손금만 본 근시안(近視眼)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는 얼마든지 현실에서도 오해와 이해가 상충할 수 있다는 인간의 심리작용임에 분명하다.

대학원 석사과정 이수중 러시아워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역에서 하차, 4호선 타고 삼각지에서 6호선으로 환승, 9시 첫 교시 수업에 겨우 닿았다. 여름 계절 학기. 그날도 분주하게 이동했다. 플랫폼에 도착하자 전동차가 서서히 입도하였다. 많은 승객들에 밀려 손잡이를 잡고 보니 아가씨 뒤에 서게 되었다. 난 부리나케 타느라고 숨이 거칠었다. 나를 째려본 그 아가씨는 ‘흥-’하며 자리를 박차고 내 옆구리를 밀치며 옆구리 멀리 가버렸다. 덕분에 나는 시야와 가방을 들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치한(癡漢)으로 오해를 받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내가 아가씨였다면 아마도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가씨를 이해하게 되었고 참 많이 미안했다.

지난 12월 동짓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아침 6시 40분이어도 깜깜하였고, 길은 밤새 눈 덮여 미끄러웠다. 살다보면 묘한 엇갈림이 있다. ‘지름길’인데 꼭 난코스가 있다는 점이다. 움푹 파였거나 가파른 곳이다. 특히 악천후 날씨는 애를 많이 먹인다. 그날도 아가씨가 분주하게 앞질러 간다. 또각또각 굽이 높은 신발. 난 간격을 두고 뒤따라갔다. 길이 미끄러워 조심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고개를 쳐드니 아가씨가 언덕 위에서 추진력을 얻지 못한 채 머뭇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며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칠까봐 ‘어-’하며 양팔을 오버코트에서 빼내 아가씨를 본의 아니게 안게 되었다. 동시에 멋 적어 양팔을 놓으려했으나 오히려 아가씨가 더 빨리 내 팔을 불쾌한 듯 뿌리치며 되돌아 내려갔다. 황당하니 마음이 언짢았다. 나의 배려가 그녀에겐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를 오해하였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여야만 했다. 옛말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이라 하여 ‘(참)외밭에선 신발을 고쳐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선 갓을 고쳐 매지 않는다.’는 군자행을 새삼 음미하며 오늘도 오해 속에 이해를 하고 이해하는 가운데 오해하는 세상을 걸어가고 있다. /진춘석 시인

▲ 1992년 시문학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사)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現) ▲ 시집 <카프카의 슬픔>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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