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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봄을 심다

 

나무 몇 그루 들고 밭으로 나간다. 지독한 한파로 몸살을 앓던 들판도 생기를 띠기 시작하고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참새 몇 마리 이 나무 저 가지 날아다니며 봄을 옮기기에 바쁘다. 냉이며 민들레는 벌써 파란 잎들을 꺼내 놓았고 나무도 입덧을 시작하는지 꽃눈을 살짝 내 놓은 것도 있다.

삽날을 세워 흙 밑을 깨운다. 몇 삽 흙을 퍼내자 흙도 태양이 낯선 지 빠르게 물기를 걷어내고 푸석해진다. 삽 끝에 걸려드는 칡뿌리를 툭툭 내려쳐 보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지난 봄에 걷어내고 남았던 칡덩굴이 제법 굵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참으로 질긴 생명력이다.

호두나무 여덟 그루와 감나무 열 그루를 심었다. 구덩이를 깊게 파고 물을 주고 묘목을 넣은 후 정성스레 밟아준다. 아직은 어린 묘목들이지만 이삼년 지나면 이것들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호두를 보면 시아버님이 생각난다. 어느 해 정월 열나흘 네 알의 호두를 주시면서 식구가 넷이니 보름날 새벽에 일어나 부럼을 깨물라 하셨다. 그래야 한해가 무사태평하고 만사가 잘 된다며 꼭 하라 하셨지만 요즘 세상에 뭐 그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 그냥 장식장 서랍에 넣어둔 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해 초여름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 우연히 보게 된 서랍 안의 호두 네 알, 벌레가 슬어 하얗게 쏟아낸 분비물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네 알의 호두를 잘 닦고 손 안에서 굴러 본다. 그 호두가 손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아버님의 생전에 말씀들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흙처럼 정직한 것이 없고 농사짓는 사람은 들판에 곡식이 자라는 것을 보면 자식을 키우는 것처럼 흐뭇하고 기쁘다며 하루 자고 나가보면 밤새 이슬이 내려 곡식을 키워놓곤 한다며 농사를 천직으로 아시던 분이시다.

오늘따라 더 그립고 다하지 못한 효도가 못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 호두나무를 심었다. 짠한 마음에 한 삽 한 삽 흙을 토닥이고 물을 주었다. 이 호두가 열리면 가장 먼저 아버님께 올려야지 하는 급한 마음도 앞선다.

심은 지 몇 년 된 대추나무에 가지치기를 한다. 어느 새 물이 올라 가지가 흥건히 젖어 있다. 지난해는 꽃이 필 무렵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꽃이 냉해를 입어서인지 대추가 붉어지면서 대부분 쏟아졌다. 웃자란 가지를 잘라내고 보조막대를 세워 나무를 고정하는 작업도 했다. 군데군데 보이는 벌레의 집을 떼어주고 가지를 타고 올라간 잡풀을 걷어낸다.

900여㎡(300여평)의 작은 밭이지만 이 땅의 주인인 잡초들을 뽑아도 뽑아도 줄어들지 않는 풀을 보면 하늘 농사가 제일 훌륭하다는 생각도 든다. 때론 바람의 길이 되어주고 구름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을 이 작은 공간. 풀을 뽑다보면 고물거리는 지렁이와 땅 밑의 생태계, 제집을 지고 다니는 달팽이까지 작은 우주를 만난다.

내가 몇 그루의 호두나무를 심으면서 아버님을 떠올리고 몇 알의 대추로 조율이시(棗栗梨枾)를 생각하는 것처럼 끼리끼리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본다. 머잖아 이 밭에 찾아들 꽃과 나비, 어디서 지난 겨울을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주인처럼 찾아들 벌레들, 진정 이것들이 이 땅의 주인이다.

한인숙 시인

▲ 1961년 출생 ▲ 한국문인협회 회원 ▲ 평택문인협회 ▲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2006년) ▲ 안견문학상 사 대상 ▲ 시집 <푸른 상처들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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