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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과거는 과거일 뿐

 

눈치 웬만한 사람은 병원에서 간호사를 호칭할 때 간호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간호사라고 부르면 자칫 싸늘한 대가를 치룰 수 있다. 사람 목숨을 다루는 중요한 일을 하는데 누구는 의사선생님이고 누구는 간호사란 말인가. 어떤 이는 인삼뿌리, 어떤 이는 무뿌리…. 혹여 ‘님’자를 붙여 간호사님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자기들이 종사하는 직업에 대한 긍지(矜持) 때문에 스스로를 높여 부르도록 단체행동을 해서 얻은 전리품(戰利品)일수도 있지만 약자에 대한 배려로 호칭만이라도 업그레이드 시켜주자는 사회적 배려도 있다.

옛날에는 미용사라고 했지만 요즘은 헤어 디자이너, 목욕탕에서 때 미는 분은 세신사(洗身士),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으로 부른다. 때로는 약간 낯 뜨거운 공치사(空致辭)적 존칭도 있는데 기사님식당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찌됐던 말 한마디에 천냥빚 갚는다고 입 인심 한번 써서 듣는 이 훈훈하다면 좋은 일 아닌가?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새로 방송되는 연속극 제목을 식모(食母)로 하겠다고 발표를 했다 큰코 다친 사건이 있었다. 사실 식모란 오래전에 폐기된 단어이다. 십년 이상 당사들이 노력해 식모는 파출부를 거쳐 이젠 엄연히 가사관리사(家事管理士)로 정착했는데, 새삼 식모라니…. 천박한 표현을 하자면 쪽팔린다는 이야기,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제목을 바꾸겠다고 발표한 후 본의 아니게 어떻고 하면서 정중히 사과를 했다. ‘노이즈 마케팅’을 노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연속극 제목을 가정관리사라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어찌됐던 단체의 힘은 무섭긴 무섭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먹을 것, 입을 것 귀했던 시절 밥만 먹여준다면 감지덕지(感之德之)하고 먹고 살만한 집에 딸을 보내는 경우가 흔했다. 그 집 식구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어정쩡한 위치로 죽도록 고생하다 적당한 사람 소개 받아서 시집을 간다. 인심이 후하고 그나마 인간적으로 대접 받았다면 시집을 가서라도 인연을 끊지 않고 왕래(往來)를 하고 이모니 고모니 하는 호칭으로 부르며, 잔치라도 있으면 허드레일도 돕고 이웃사촌보다는 훨씬 가까운 관계가 계속 유지된다.

주인집 어른이 죽으면 자식보다 더 섧게 울고 상주(喪主) 노릇을 한다. 어쩌면 자식들보다 더욱 진한 사연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처녀적 신분이 탄로날 것이 두렵고 또 지긋지긋한 시절을 떠올리기 싫어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 그 집 인심을 살피자면 식모를 보면 안다는 말 있다.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이 제일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박탈(剝奪)이라고 한다.

잠 올 때 잠 못 자고 먹기 싫을 때 먹어야 하고 움직이기 싫을 때 운동해야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나? 하나같이 주인집에 맞춰서 행동하고 사고해야 하는 비참함이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 생각난다. 주인공 잔느는 부잣집에서 태어난다. 시집갈 때 혼수를 바리바리 싣고 가는데 그 속에는 당연히 하녀도 포함됐다. 잔느는 든든한 신랑이라도 만나지만 하녀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생이별 해야 하고….

어쩌면 이 대목에서 신을 원망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시집가고 보니 신랑은 천하의 난봉꾼, 무차별 사랑놀음을 하다 애인의 남편으로부터 피살(被殺)당한다. 끝내는 하녀의 품에 안겨 하는 말, “그렇다! 기대 한다는 것은 이미 끝났다. 오늘도 내일도 아니 영원토록” 미물(微物)로 취급받던 하녀에게 안겨서 세상에 부러울 것 없던 귀공녀가 한 말이다. 과거에 주위가 온통 기대로 넘실됐는데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그 기대가 사라졌다. 이 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식모(하녀)가 공주가 될 수 있고, 공주가 식모가 될 수 있다. 그렇다! 과거는 과거인 것이다. /김기한 객원논설위원·前 방송인 예천천문우주센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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