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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민병갈’을 아십니까?

 

광릉수목원에 있는 ‘숲의 명예전당’이라는 곳에 가면 조형물에 여섯 사람의 동판 초상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 산림 발전에 공헌을 한 주인공들이다.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다소 의외인 듯 하지만 그가 재임 중 산림녹화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명예전당의 첫 번째 자리에 있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오히려 엉뚱하다 싶은 초상은 다섯 번째 인물이다. 뿔테 안경이 걸린 오똑한 콧날이 아니더라도 풍기는 인상부터가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희로부터 시작돼 나무할아버지 김이만, 육종학자 현신규, 독림가 임종국으로 이어지는 앞 서열의 네 명과 맨 끝자리에 있는 SK그룹 창업주 최종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낯선 얼굴의 이방인은 누구일까. 또 무슨 이유로 전직 대통령과 함께 국가적인 기념물에 이름을 올리게 됐는가. 이런 의아심을 갖고 초상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민병갈 像’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계속해 초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양각돼 있다. ‘이 땅과 나무를 사랑한 민병갈(Carl Ferris Miller) 1979년 한국인으로 귀화하기 전 1962년부터 40여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남 태안의 헐벗은 산림을 1만300여 종의 식물종이 살고 있는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가 우리 국민에게 선물한 천리포수목원은 우리나라 식물자원의 보고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소중한 자원으로 활용될 것이다.’

기념비에 쓰인대로 민병갈은 반세기 넘게 한국에 살면서 세계적인 수목원을 일구어 놓고 이 땅에 묻힌 귀화 미국인이다. 광복 직후 미군 장교로 한국에 와서 한국의 자연에 빠졌던 그는 외국산 나무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끝에 30여 년 만에 아시아 정상급의 수목원을 만들어 놓았다. 태안 해안국립공원의 북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천리포수목원이 그것이다. 이 수목원이 보유한 식물은 2011년 현재 1만1천종으로 국립수목원보다 5천 종이 많으며, 목련류와 호랑가시류 수집 규모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 받는다. 언론인 임준수가 민병갈을 처음 만난 것은 식목일을 며칠 앞둔 1992년 봄이었다. 신문에 ‘나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한 대담이 계기가 됐다. 민병갈은 천리포 근처 안흥이 고향인 임준수를 친근한 동향인으로 대해줬다. 그후 그들의 만남은 10년 동안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으로 계속됐다. 만남은 한 달에 두 세 번 꼴로 민병갈의 서울 명동 사무실이나 천리포수목원을 찾아 정담을 나눴다. 그때마다 민병갈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광복 직후 미군장교로 와서 반세기를 이 땅에 산 체험담이 흥미진진했다.

2002년 3월 어느 날 민병갈은 죽음을 예견하고 가까이 지내던 친지 몇 사람을 점심에 초대했다. 밥 한 술도 입에 넣지 못할만큼 병세가 깊었던 그는 ‘음식을 버리면 죄’라는 말로 분위기를 잡으려 애를 썼다. 그리고 식사가 끝난 뒤 작은 선물꾸러미를 건넨다. 석고로 만든 작은 개구리였다. 생전에 민병갈은 죽어서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4월 12일 민병갈은 태안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는다.

지난 주말인 23일 천리포수목원에선 ‘회원의 날’ 행사가 열렸다. 해마다 목련이 활짝 피는 4월 중순경에 갖는 정기적인 모임이다. 전세계적으로 자생하는 500여종 가운데 420종의 목련이 천리포수목원에서 자라고 있다. 민병갈은 목련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위해 목련원이 내려다보이는 후박나무집 마당에 목련을 심었다. 그가 키워 세계목련학회에 등록한 ‘라스베리 펀’이다. 그리고 팻말에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애드나 밀러에게 바친다’라고 적었다. 민병갈과의 인연으로 임준수는 2004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이라는 책을 냈다.

민병갈은 수목원이 일반에 공개되는 걸 원치 않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으면 식물들의 생장에 지장을 받을까봐여서였다. 그러나 일정한 수입이 없이 그가 40년 동안 가꿔온 18만평 규모의 거대하고 역동적인 생명의 정원을 유지해 나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공개를 결심한 것이 2만 평 규모의 본원이다. 이는 7구역으로 나뉘어진 천리포수목원의 일부에 불과하다.

전생에 자신은 한국인이었다며 우리 것을 사랑한 민병갈은 자식처럼 키운 천리포의 나무들을 제2의 조국 한국에 바치고 떠나갔다. 그가 소원했듯 본원에 있는 ‘밀러스 가든’ 연못가엔 개구리 석상이 놓였다. 이제 목련이 지고나면 곧 개구리들의 왁자한 합창이 시작될 것이다. /이해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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