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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나혜석을 위한 변명

 

내 책상 위엔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키스’가 액자에 다소곳이 세워져 있다. 화려하지만 끊임없이 역동적이며, 관능적이고 육감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초조한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키스’에 버금가는 클림트의 작품이 ‘유디트’다.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의 미술관에 ‘키스’와 함께 걸려 있는 ‘유디트’는 몽환(夢幻)적이다. 검은 머리가 비현실적으로 크게 부풀려져 있고, 그 배경으로는 황금색의 평면적 문양들로 장식돼 화려함을 더해준다. 그리고 붉게 상기된 볼과 지긋이 내려다보는 눈은 오르가슴에 도달하기 직전, 그 느낌의 근원을 탐색하려는 눈빛과도 같다.

 

 구약성서 외경(外經)에는 아시리아의 용장 홀로페르네스가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포위하자 유대인 과부 유디트가 그의 처소에 잠입해서 목을 벴다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한 유디트 치명적인 매력은 예술가들의 단골 소재가 됐다. 클림트 이전에 르네상스 시대 카라바조와 조르조네를 비롯한 수많은 화가들은 칼을 들고 있는 유디트와 목이 잘려나간 홀로페르네스의 고통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하지만 클림트는 화가 특유의 황금빛 색채감과 함께 나른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유디트의 표정만을 부각시켰다. 약자인 여성이 강자인 남성의 목을 벴다는 유디트의 이야기엔 성(性)과 죽음의 ‘팜므 파탈(femme fatale)’적인 이미지로 이처럼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유디트’의 ‘팜므 파탈’적인 이미지를 나혜석(羅蕙錫,1896~1948)과 대비시키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서두의 클림트에 대한 장광설(長廣舌)은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매력’이 거세된 클림트의 ‘유디트’는 세기말적인 관능만 남겼듯이, 나혜석의 삶의 본질 또한 상당부분 왜곡돼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그녀가 후대에 알려진대로 과연 여성해방운동의 전사(戰士)로서의 자격이 충분한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나혜석은 첫 딸을 낳고, ‘(남편인)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란 뜻으로 딸의 이름을 ‘김나열(金羅悅)’이라고 지었다. 이즈음 나혜석의 ‘인형의 家’가 발표됐다. 1921년 1월 25일부터 매일신보에 입센의 ‘인형의 집’이 연재됐는데 마지막 회인 4월 3일자에 나혜석의 이 시가 실렸다. ‘노라’처럼 결혼한 지 1년 남짓한 26세의 나혜석은 인형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청춘을 불사르고’의 김일엽(金一葉·1896~1971)은 ‘아껴 무엇 하리 이 청춘을’이라는 책에서 나혜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혜석은 한 살 아래인 미소년 미대생 최승구와 열애에 빠지지만 그는 폐결핵으로 19세의 나이에 요절을 하고 만다. 이에 충격을 받은 나혜석은 자신을 순정적으로 따르던 경성제대 법대생인 김우영과 약혼을 한다. 약혼 후에도 나혜석은 이광수와도 사귄다…’ 나혜석의 갈짓자 애정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혜석과 김일엽은 1896년 생으로 동갑내기다. 목사의 딸로 태어난 김일엽 또한 가부장적인 사회인습에 여성은 남성을 위한 소모품이 아니라고 절규했다. 그리고 수덕사로 출가해 중이 된다.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禍不單行)’고 했던가. 이혼 후 인생이 꼬일대로 꼬인 나혜석은 친구를 찾아 수덕사를 찾지만 당대의 선(禪)지식인 만공(滿空)은 “임자는 중노릇 할 사람이 아니야”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셈이었다. 나혜석은 죽기 전 4남매 아이들에게 “어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혜석에 대한 후대의 찬사는 몇몇 혹자(或者)들에 의해 과대포장 된 면이 없지 않다. 아무리 고루한 유교적인 잣대라고 하지만 그녀의 불륜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엄밀히 따져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아야 할 나혜석이 여성 해방의 선각자로 추앙을 받는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림이나 글도 그의 명성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여성으로서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와는 한창 거리가 멀다. 이런 이유로도 나혜석을 추억할 때 최초의 여류화가로서의 나혜석이면 충분하다. 더 이상은 나혜석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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