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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특집] 여주 ‘명성황후 생가’를 찾아서

태어난 ‘생가’·조선왕후 2명 머문 ‘감고당’
시대상 알려주는 사진자료 전시된 ‘기념관’
황후의 성품 드러내는 서찰 등 볼거리 가득

 

■ 불꽃처럼 살다간 국모의 땅   질곡 헤친 지혜가 빛나는구나
여주는 남한강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 역사,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여주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신륵사, 명성황후생가, 목아박물관, 여주온천, 고달사지, 신세계첼시아울렛, 황학산수목원 등이 있다.

이 중 여주가 낳은 뛰어난 인물로 명성황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았던 명성황후 생가는 ‘명성황후 생가 성역화 사업’으로 명성황후의 업적을 기리고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여주 명성황후 생가, 이번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명성황후생가를 찾아 명성황후의 삶에 대해 공부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편집자주>

▶ 명성황후와 생가의 역사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번지 명성황후 생가(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에 가면 지혜와 통찰력을 갖춘 뛰어난 외교력의 소유자 명성황후를 만날 수 있다.

명성황후생가는 조선의 제26대 임금인 고종황제(1852~1919)의 비인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세까지 살던 집으로 1687년(숙종13)에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됐다.

명성황후는 영주군수 등을 지낸 민치록의 딸로 16세에 왕비로 책봉됐고 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시해될 때까지 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4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능은 본래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경기도 남양주 홍릉으로 이장해 고종황제와 합장했다.

▶ 명성황후 생가기념관에 가면

명성황후 기념관의 일반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의 인품과 학식, 사상, 궁중유물 등이 보이며,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계, 교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혁명, 갑오경장, 을미사변, 명성황후국장 등 그 시대상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사진으로 정리돼 있다.

특히 명성황후의 서찰 20장을 한데 묶어 제책한 것으로 이모(한산이씨)가 보낸 서찰에 대한 답장인 서찰에는 명성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과 냉철한 두 성품이 잘 드러나 있다.

‘아! 옥호루’는 안타까운 명성황후의 죽음을 매직비전으로 만들어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용 자료가 되고 있다.

전시실에서 야외로 나오면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비, 순국 숭모비가 홀연히 자리 잡고 있으며 비단잉어들이 떼지어 노는 연못이 있다.

명성황후를 기리는 세미나와 영화, 각종 문화행사 등을 할 수 있는 문예관이 있으며 전통 놀이문화를 비롯해 전통공예, 민속음식을 즐길 수 있는 민가가 잘 만들어져 있다.

민가를 돌아본 후 명성황후가 간택되기 전까지 머물던 감고당에 들르면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 명성황후와 인현왕후의 숨결, 감고당

감고당은 조선왕조에서 두 왕비를 배출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1667~1701)가 왕희빈과의 갈등 속에서 왕비에서 물러난 후 이후 복위될 때까지 5년여 동안 이곳에서 거쳐했고, 명성황후(1851~1895)가 8살 때 여주에서 한양으로 올라간 후 1866년(고종3)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이 곳에서 머물렀다.

감고당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761년 영조가 인현왕후를 기려 ‘감고당’이라는 편액을 하사한 이후부터다.

처음에는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덕성여고 본관 서쪽애 위치해 있었으나, 1966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옮겨졌고 이후 쌍문고등학교 신축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2006년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던 여주군이 현재 위치로 이전 건축한 것이다.

감고당은 사랑채와 중문채, 안채로 구분돼 있다.

특히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성들의 외부출입을 제한했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 볼 수 있다.

명성황후 역시 8세때부터 왕비로 간택, 책봉되기 전까지 이곳에서 머물렀고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가 왕비에서 물러난 후 이 곳에서 거처했다.

▶ 명성황후에 대해서

-명성황후의 인품과 학식

어려서부터 읽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옳고 그른 것을 뚜렷이 밝히는 분별성과 행동에 과단성이 있었다. 일찍이 홀로된 어머니 섬기기를 지성으로 다했으며 왕비가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명성황후의 필적은 힘이 있고 당당해 국모로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명성황후의 어린시절

명성황후 생가는 본래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소 관리를 위해 1687년에 지어진 묘막이다.

민유중의 직계 후손인 민치록은 조상의 묘를 관리하며 이곳에서 살다가 1851년 9월25일(양력 11월17일), 부인 한산 이씨와의 사이에서 명성황후(민자영-兒名)를 낳았다.

명성황후는 대대로 훌륭한 가문인 여흥 민씨로 8살때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현숙한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손색없는 양가의 규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의 왕비책봉

1866년 음력 3월(고종3년)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16세에 왕비로 책봉된 명성황후는 대궐 안의 수 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전통과 현대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됐다.

마침내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고종황제를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작업에 착수했다.

-명성황후의 업적

1876년 일본과의 수호통상을 시작으로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고 청나라에 영선사를 보내 서구유럽과 이웃나라의 선진문물과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1882년 영국과 미국에 문호를 개방했고 1884년 프랑스와 수교이후 개신교의 포교가 허락됐으며, 1886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의 이름을 하사하는 등 많은 외교적 노력과 업적을 이뤘다.

-명성황후의 외교전략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우리나라의 왕권과 국권을 침해하기 위해 혈안이 됐을 때 이를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이제이(以夷制夷:적으로써 적을 치게 함)의 뛰어난 국방 외교 전략을 강구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외교력으로 대 러시아 외교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은 마침내 1895년 8월20일(양력 10월8일) 새벽 경복궁 내 건청궁(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45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명성황후생가 조성경위

명성황후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와 주권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후손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명성황후생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했다.

-감고당

인현왕후가 머물던 사저이며 명성황후가 간택 전까지 머물던 곳으로서 서울에 있던 것을 이전해 중건했으며 향후 전통문화 체험장소로 활용할 예정이다.

-명성황후 기념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연면적 519㎡(지하1층, 지상1층)규모의 기념관을 건립했다.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의 친필과 서가집, 고종의 영정 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문예관

명성황후 기념관 옆에 위치한 문예관은 연면적 773㎡(지하1층, 지상1층), 관람석 161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명성황후와 관련된 행사 등을 위한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관람안내

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 오전 9시부터 오후6시, 동절기(11월~2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1월1일과 설날, 추석날은 휴관한다. 매년 10월8일(양력) 명성황후 시해일을 추모하는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관람문의는 명성황후생가 유적관리사무소 ☎031-887-3575~6

/여주=이달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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