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아침의 향] 먹을거리

 

중학교까지의 길은 멀었다. 매산리, 양벌리 벌판을 지나 경안천 섶 다리를 건너 읍내 안 20리가 훨씬 넘는 길을 우리 동네 여섯 명은 하루도 빠짐없이 줄기차게 걸어 다녔다. 아침저녁 왕복 네 시간을 길에다 버리고 나면 피곤하기도 하거니와 공부 할 시간이 없었다. 자연히 공부는 길에서 했다.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이 먹을거리를 찾는 일이었다. 한참 클 때이니만큼 먹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른 봄 둑길 위로 올라오는 삐리를 시작으로 찔레, 시엉풀, 버찌, 오디, 살구, 자두 등등…. 아직 채 익기 전 퍼런 밀과 보리이삭을 잘라서 불에 그슬린 다음 손으로 비벼서 입에 털어 넣고 손과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씹어 먹는 맛은 그야말로 일미였다. 장마철이 되면 비도 많이 오지만 서리할 기회도 많았다. 양벌리 길가에 있는 자두 밭을 지날 때에 비가 오고 있으면 밭으로 살금살금 들어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의 가운데에다 자두가 줄줄이 달려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잡아 죽 훑어 넣고 밖으로 뛰어나와 천연스레 그 곳을 지난 후 먹을 만한 것을 대충 추린 다음 익지도 않고 시고 떫은 자두를 잘도 먹으며 집으로 갔다. 마지막 먹을거리는 재래종 배추뿌리 다. 가을걷이가 끝나 겨울이 된 벌판에 남아있는 몇 포기의 배추뿌리는 우리들을 꽤나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것뿐인가. 한겨울에는 종종 아침 등교길 매산리 고개마루 성황당에 푸닥거리하고 갖다 놓은 밤, 사과까지 집어먹었다.

지금은 두 시간 거리의 길을 걸어 다니는 학생도 없지만 도로도 포장을 하고 폭이 넓어져서 승용차로 가면 십여 분 거리로 단축됐다. 맬더스의 인구론에 따라 인구가 5천 만 명이되면 식량기근이 날 줄 알았는데 지금 우리는 거의 모두가 어떻게 하면 다이어트에 성공해서 살을 뺄 수 있는지에 골몰할 정도다. 물론 국민 모두가 배를 움켜쥐고 잘 살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다. 학교 길에서 지천으로 보던 보리, 밀, 조(黍粟), 수수는 이제 눈을 씻고 보아야 할 정도로 줄었다. 추수가 끝나도 대부분 밀과 보리를 심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살림은 쌀이 남아 주체를 할 수없게 되었다. 이 무슨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우리나라는 농사가 없어져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정말 그런가?

몇 년 전 일본 큐우슈우의 유후인(湯布院) 지방을 기차로 지나게 됐다. 벳푸(別府)까지 가는 두 시간 내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와 밀밭이었다. 그 곳 농부들은 경제성과 관계없이 계속 식량작물을 개량하고 가꾸고 있다는 것이었다. OECD국가들 중 영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가 곡물자급률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영국은 한때 19%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지만 세계 1, 2차 대전을 치르며 비상시 국민의 식량조달이 얼마나 큰일인가를 느낀 나머지 전 국민운동으로 밭을 가꾸기 시작해서 지금은 120%라는 경이적인 기적을 이룩해냈다. 일본 또한 자급률이 40%에 불과한 나라이지만 브라질 등 해외에 국내 경지면적의 3배를 능가하는 토지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현재 곡물자급률이 26.8%이지만 계속 내려가는 추세여서 심히 걱정스럽다. 쌀만은 그 동안 농협과 국민의 노력으로 95% 자급하고 있으나 이는 지난 40년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140kg에서 70kg대로 급감한 데 기인한다. 인천항엘 가보면 부두에 밀과 옥수수가 산처럼 쌓여 있고 신포동 일대는 비둘기의 천국을 이룬다. 결국 쌀을 제외한 우리들의 먹거리는 인천항인 셈이다.

우리 지역에서만이라도 밀과 보리를 빈 밭마다 심으면 어떨까? 얼마 전 우리 밀 살리기 운동으로 밀 재배가 불같이 일어났다가 판로 때문에 몇 해 못 가서 시들해 진 예가 있지만 지자체가 중심이 돼 수매와 판로를 보장해 추진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대도시 근교에서는 농촌다운 모습만 갖춰도 그것으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머잖아 우리 지역에서도 예전처럼 밀과 보리내음이 넘실거리는 풍요로운 들녘을 거닐게 될 날을 기대해 본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