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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리더] 김성열 ‘극단 성(城)’ 대표

문화적 소통 위해 ‘어린이 뮤지컬 정조대왕’ 준비
화성행궁 찾은 초·중학생에 孝心 각인시키고 싶어
무예 24기 아닌 창작 무예극 준비… 학자 삶도 조명

 

“수원 화성이 품은 역사적 스토리 뮤지컬로 담아내 경쟁력 높여야”

- 소극장을 개관한 감회가 어떤가. ‘수원시민소극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눈길을 끄는데.

“이제 수원의 연극인들도 남의 눈치 안 보고, 대관료에 주눅들지 않고도 마음껏 연극을 할 수 있게 됐다. 임대료도 없다. 다만 전기세와 수도세만 내면 된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래서 ‘시민극단’도 창단한 거다. 이제 시민들도 단순한 문화예술의 소비자가 아닌 생산적 주체로 참여하게 됐다. 시민극단의 작품은 계속 이어질 거다.”

수원시민소극장은 아담하다. 소극장을 꾸미는데 무려 한달여 걸렸다. 쓰레기만을 치우는데 일주일 걸렸다. 그 분량만해도 1t 트럭 9대분. 실내 인테리어는 김 대표와 극 단원들이 직접 페인트를 칠했다. 객석 의자는 82석은 시민들로부터 1석당 4만원씩 후원을 받았다. 무대와 객석이 아주 가까워 실감나는 뮤지컬을 볼 수 있다.

- 첫 작품을 ‘선각자 나혜석’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지역 사회의 문화적 자원들을 기초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기 위해서였다. 문화의 힘은 눈과 귀로 보여줄 때 비로소 생명력을 갖는다. 나혜석을 선택한 이유다. 두 번째 공연으로 ‘어린이 뮤지컬 정조대왕’을 준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도시가 품은 역사문화적 스토리만큼 더 강한 경쟁력은 없기 때문이다.”

시민극단의 ‘선각자 나혜석’ 공연은 4회 전석 매진됐다. 110명 좌석이 모자라 무대 앞 바닥에 시민들이 털썩 주저앉아 관람했다. 대성황이었다. 오는 8월 수원국제연극제 기간에 그 성원에 힘입어 앵콜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 문화관광, 연극예술에 초점을 맞춰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전략인가.

“그렇다. ‘수원화성’이란 엄청난 하드웨어를 갖고 있으면서 이를 살리는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그건 ‘돌덩이 성곽’에 불과하다. 엊그제도 초교생 수학여행단이 400여 명이 수원화성을 둘러봤지만 큰 학습효과가 없다고 하더라. 학예산의 설명이 쏙 귀에 들어올리 만무다. 그래서 뮤지컬이 필요하다. 수원화성과 정조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1시간 짜리 뮤지컬로 보여주는 게 이해를 돕는 첩경이다. 빠르면 6월 공연이 시작된다. 지난 3월 남한산성에서 펼쳐졌던 ‘칼의 노래’ 마당극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날 관광객들이 남한산성을 둘러본 후 종착지에서 이훈의 원작 ‘칼의 노래’를 마당극으로 선보였는데 반응이 대단했다.”

그에게 어린이를 위한 ‘정조대왕’ 연출은 두 번째다. 지난 1983년 극단 ‘성(城)’을 창단, 한달간 공연해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당시 극단 대표를 맡고 있던 모 정치인이 그 돈을 갖고 튀는 바람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30년 만에 뮤지컬로 다시 선을 보이는 셈이다.

-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계속해서 선보일 건가.

“무궁무진하다. ‘수원화성’을 중심에 두고 정조와의 인연이 깊은 김홍도, 정약용 등 학자와 예술인들의 삶을 조명하는 뮤지컬을 계속해서 만들 예정이다. 무예 24기가 아닌 창작 무예극을 선보이고 싶다.”

그는 정조실록 27권을 6개월간 밤을 새워가면서 봤다. 이를 토대로 정조대왕의 희곡도 썼다. 최근에는 정조와 개혁적 지식인 집단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왕의 눈물’(이재운 著)을 읽었다. 정조에 대한 그의 놀라운 집념이다. 정조와 ‘수원화성’을 예술의 화수분으로 삼으려는 그의 연출가적 의지다.

- 흥행성은 있다고 판단하는가.

“대박이 날 것이다. 아마추어 시민배우들의 뮤지컬 ‘선각자 나혜석’도 대성황이었다. 하물며 기성 배우들로 구성된 ‘어린이 뮤지컬 정조대왕’의 6월 공연에는 관광인파가 몰릴 것이다. 돈 들이지 않는 마케팅도 병행할 것이다. 화성행궁을 찾은 초교생과 중학생들에게는 오래도록 뮤지컬 ‘대왕정조’와 그의 효심(孝心)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어린이 날 공연했던 송승환 연출의 뮤지컬 ‘피노키오’를 빗대 설명했다. 당시 입장료가 2만5천~3만원 이었는데 일가족 4인이 10만원을 내고 보더라고 말했다. 하물며 역사적인 ‘정조대왕’이야말로 뮤지컬 공연 땐 1만원만 받아도 대성공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 이번 소극장 개관이 다섯 번째라고 하던데.

“4전5기이다. 그 시작은 1981년 화홍예식장(現 후생병원)이다. 개관 첫 공연으로 ‘아일랜드’를 선보였다. 두 번 째는 86년 신풍동 소극장인데 건물주의 극력 반대로 바로 폐관했다. 세 번 째도 그해 북문농협 앞 정독빌딩 지하 소극장이다. 94년까지 여기서 웅지를 틀었는데 당시 ‘좌파 연극’을 공연해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햄릿’ ‘맥베드’ ‘고도를 기다리며’ 등을 공연한 것도 이때다. 대박을 터뜨렸다. 네 번 째는 2007년 남문 청운약국 뒤편 지하 6~7층인데 1년 만에 접었다. 깊은 지하이다보니까 공기가 안 통해 배우들의 얼굴과 손에 반점이 생기고 비상구가 없어 큰일날까 싶어 폐관했다. 그리고 이번이 다섯 번째다. ‘내 인생의 마지막 개관’이었으면 좋겠다.”

김 대표는 세 번 째 정독빌딩 지하 소극장 때를 유난히 기억한다. 그 시절(1990년), 수원시민회관에서 ‘햄릿’을 공연했는데 ‘현관문’이 무너질 정도로 600석이 모두 매진돼 돈을 담을 때가 없었다. ‘햄릿’은 수원 연극 사상 처음이었다. 또 94년 샤뮈엘 베케트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주인공 ‘럭키’역을 맡아 열연했다.

당시 이를 관람했던 미술평론가 故 오주석 씨는 “럭키 때문에 연극이 대성공이었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작품을 계기로 김 대표는 96년 수원화성국제연극제를 유치한다. 또한 본격적인 연출가로 변신한다.

- 연극에 뛰어들게 된 동기는. 수원에는 언제 왔나.

 


“연극은 휘문고 2학년 때 시작했다. 연극에 미쳐 서울대에 서너차례 낙방했다. 이후 배우, 조명, 음향, 연출에 이르기까지 두루 거쳤다. 70년대 친구인 박광수(공포의 외인구단, 칠수와 만수 제작) 감독을 따라 연우무대에서 극장 표받은 것부터 시작했다. 이후 79년 친구인 이창현(중앙일간지 신춘문예 희곡당선) 작가를 따라 수원에 와서 아주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이 길로 평생 업을 삼게 된 시점이다.”

79년 수원에 내려와 약 4년간 그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시민극단 동우회에서 첫 출연한 ‘아일랜드’에서 죠니 역을 맡았는데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나 81년 샤뮈엘 베케트의 ‘승부의 종말’ 공연 땐 객석에서 신발이 날라와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이때 ‘다시는 이 길을 안간다’고 다짐하고 화성 용주사로 들어간다. 여기서 칩거하면서 연극연출에 대한 200여 권의 원서를 독파한다. 그는 “정신이 확 깨더라. 번역 서적 안톤 체홉의 희곡에서 세익스피어 희곡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책자는 달달 외웠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이같은 대오각성을 한 후 드디어 극단 ‘성(城)’을 창단한다. 1983년의 봄이다.

- 요즘 뮤지컬이 대세이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기성 연출가들은 대체로 순수 연극을 고집하던데.

“뮤지컬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뮤지컬도 분명한 야마(정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종욱 찾기’와 ‘빨래’ 뮤지컬을 보고서다. 하지만 요즘 연극은 ‘개그’다. ‘야마(정신)’가 없다는 것이다. 뮤지컬을 만들 땐 야마와 철학이 있어야 한다. 까뮈의 작품으로 뮤지컬을 만드는 시대 아닌가. 이번에 ‘선각자 나혜석’을 만들 때 원고지 20매 분량의 나혜석의 연작시 13편이 단 한곡의 음악으로 표현되더라. 너무 놀랐다. 뮤지컬이 대세다.”

- 지역예술에 대한 지자체의 지원과 관심은 요원한 것 같은데.

“대표적 사례를 들겠다. 김용서 수원시장 때 예술인들이 ‘공간’ 요청을 간곡히 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 갑자기 김 시장이 “KBS드라마센터에 6억을 지원해 아트홀을 만들었다”면서 “편하게 활용하라”고 하더라. 그런데 KBS드라마센터 측에 찾아갔더니 ‘서울기획사에 권리금을 받고 용역을 줬으니까 용역사 측과 얘기하라’고 하더라. 기가막혀 시에 찾아갔더니 ‘우리는 모른다. KBS측에 물어보라’고 하더라. 어디 그뿐인가. 지난해 5월 장애인 극단인 ‘난다’를 창단했다. 그 첫 공연으로 서울 대학로에서 ‘선(禪)’을 공연했다. 올해 두 번째 작품인 ‘꽃이 된 애벌레’ 공연을 하려고 경기문화재단 측에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허사였다. 되레 서울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2천600만원을 지원해주더라. 이 정도만 얘기하자.”

그는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그도 벌써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이어서인지 밝은 쪽을 보자고 말한다. 그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연극은 치유하고 치유받는 것이다. 요즘 말로 사회적 통섭이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장애인 극단을 창단했고, 치매노인을 위한, 자폐아 학생들만을 위한 연극도 공연할 생각이다. 부모없는 아이들을 위한 합창단도 창단할 예정이다. 그건 바로 ‘수원시민소극장’이란 ‘터’를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는 “소극장에서는 연극 뿐만 아니라 합창, 비보이, 무용, 락밴드, 퍼포먼스 등 모든 공연을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공간 확장은 무서운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쉼표’도 ‘종착역’도 없는 그의 연극인생이다.

‘바닥부터 기었다. 어느 덧 58세. 외길 인생, 타지에서 삶을 배웠다’ 극단 ‘성(城)’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김성열(58) 씨의 얘기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하지만 ‘삶과 연극’에 대한 그의 논조는 분명했다. 마치 비교철학을 강의하는 30대 신예 교수처럼…. 그는 먼 길을 돌아왔다. 휘문고 2학년 때부터 지금껏 한 평생을 연극이란 ‘성(城)’을 쌓아 왔다. 40여 년, 그 긴 세월의 8할은 만신창이였다. 그의 불꽃같은 영혼이 없었던들 이미 죽었을 터. 스스로 기구하려고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또 ‘반란’을 시도했다. 소극장을 개관한 것. 벌써 다섯 번째다. ‘21세기는 공간이 화두’라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신풍초교 앞 레지던시(창작마을) 건물 지하 210여㎡(70평). 객석 110석 규모다. 수원시를 설득해 이뤄냈다. 이름하여 ‘수원시민소극장’. 이를 기념해 수원시민극단도 창단해 지난 3월 27~30일 ‘선각자 나혜석’을 연출, 공연했다. 그의 고향은 멀리 실향민의 도시인 강원도 속초. 79년 수원에 왔다. 흘러흘러 유랑객처럼…. 이후 33년간 ‘정조대왕’ ‘금관의 예수’ ‘만인보’ ‘햄릿’ ‘맥베드’ ‘고도를 기다리며’ 등 웬만한 유명 작품들을 거의 다뤘다. 80년대에는 ‘빨갱이’로 불리며 의식있는 작품을 다뤄 교도소 담장 위를 걸어다녔다. 그는 이제 ‘수원화성’을 문화의 중심에 두고 이를 스토리텔링 하는 ‘작품’에 승부를 걸었다.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통섭을 위해서다. 그의 지향점이다. 개관을 기념해 두 번째 작품으로 ‘어린이 뮤지컬 정조대왕’을 준비하는 배경이다. 지난달 23일 밤 9시, 한창 이 작품에 혼신을 쏟아부으며 배우들을 지도하는 그를 지하 ‘수원시민소극장’에서 만났다. 2시간여 소탈하게 그의 굴곡진 인생과 그가 꿈꾸는 연극예술을 들어봤다.

약 력

-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 휘문고, 동국대학원 공연예술학과 석

사(노자 홍사용의 연구, 연극활동을 중

심으로 학위 받음)

- 1976~1979 극단 연우무대에서 막일

- 1979년 수원 정착, 시민극단 동우회에

서 ‘아일랜드’ ‘승부의 종말’ 주연배우

로 활약

- 1981년 소극장 화홍예식장에 소극장 첫

개관 ‘아일랜드’ 공연

- 1983년 극단 ‘성(城)’ 창단

- 1986년 신풍동에 소극장 두 번 째 개관

- 1986~1994년 북문농협 앞 정독빌딩 지

하에 세 번째 소극장 개관, ‘햄릿’ ‘맥

베드’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 2007년 남문 청운약국 뒤편 지하에 네

번째 소극장 개관

- 2011년 3월 신풍초교 앞 레지던시(창작

마을) 건물 지하에 다섯 번째 소극장 개관

- 2011년 3월말 소극장 개관 기념 첫 공연

으로 ‘선각자 나혜석’ 4회 공연

/사진=이준성기자 oldpic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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