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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벌목(伐木)정정(丁丁)

 

20여년이 지나도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소나무가 비실비실 옆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다른 소나무에 기댄 채 그렇게 엊그제부터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예리하기만 했던 솔가지 끝에 대롱 매달려 끝 뾰족한 솔잎들이 지나가는 바람들을 콕콕 찍어대던 그 뾰족한 솔잎이 힘없이 주루루 황망(慌忙)하게 쏟아집니다.

아무리 허기가 져도 결코 양손을 벌려 밥 깡통을 두들긴 적은 없었습니다. 배고프면 쓰디쓴 눈물을 포도청 가까운 목젖에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몹시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으면 그제야 구걸타령을 구성지게 노래했지요. 지나가던 새들이 물고 온 모이를 조금씩 뿌려주더군요. 그럴 때는 바람이 눅눅한 습기를 몰고 와 생명 같은 물기를 뿌려 생기를 주었습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폭력 앞에선 기운 센 장사도 무기력한 노예로 전락하는가 봅니다. 그래도 멧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던 나무였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멧새에게 터를 제공했지요. 물론 가끔 서너 마리의 송충이가 스멀스멀 기어가면 멧새는 정확히 콕 찍어냈어요. 등줄기가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그리고 계곡바람이 사납게 치불면 둥지를 아주 꽉 쥐었어요. 꼭 그런 사나운 바람이 지나고 나면 새 새끼들의 노랫소리가 메아리칩니다. 그래 지금은 힘들어 많이 기울었습니다. 허구헌날 이 가지 저 줄기를 할퀴고 꼬집고 꺾어내고 찍어내고 그래서 일어설 수 없도록 많이 기울었습니다. 줄기가 땅 끝에 닿아 땅 냄새 맡으면 생기보다는 허기가 져서 저 세상이 보일 듯도 합니다.

아주 우연히 지나가다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나무 그늘에 좀 쉬어가려고 파고들었는데, 웬 나무좀벌레가 그리도 많은지요. 생명줄이 끊어질 때쯤엔 기생충들이 활기를 띤다죠?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씀. 무슨 잘못이 많다고 이 숲에서 아예 찍어내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새파란 도끼가 저 나무의 목숨을 노리고 눈을 부릅떴습니다.

맨 아래를 보니 뿌리가 예리하게 잘려 있습니다. 나무를 고사(枯死)시키는 오렌지빛깔 고엽제가 든 플라스틱 주사기가 꽂혀있었습니다. 비명소리가 끝 뾰족한 솔잎에 매달려 바람에 실려 이 골짝 저 골물로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나무의 비명소리는 새끼 잃은 어미코끼리의 젖은 울음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다시 귀 기울여 들으면 벌목(伐木)정정(丁丁)합니다. 나무가 푸른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때, 외마디 소리는 온 숲을 슬프게 하여 쩡쩡합니다. 그래서 정정(丁丁)입니다. 숲속에 천성(天性)대로 뿌리를 내렸는데 베어짐을 당했습니다. 인간의 소용이 닿는 대로 그 인간에게 숲은 길을 터주고 나무는 찍혀 쓰러지고 그래서 비극의 소리, 벌목(伐木)정정(丁丁)입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의 어는 곳에선 찍혀 베어 넘어지는 나무같이 해고(解雇)되어 비극의 울음을 삭혀야 하는 벌목(伐木)이 있습니다. 소용 닿도록 배려하는 사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진춘석 시인

▲ 1992년 시문학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 (사)한국문인협회 평택지부장(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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