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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낳은 정 기른 정

 

요즘 들어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빈약한 서가를 채우느라 가끔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책도 몇 권 사곤 하는데, 사놓으면 언젠가는 보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머리 아픈 책보단 가벼운 것이 좋고 더구나 두꺼운 책은 절대 사절이다. 하여간 새로 산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먼지 더덕 붙어있는 옛날 한번 보았던 책을 꺼내들고 처음 본냥 감격하는 일이 많다. 오래된 옷이 주는 편함 때문일까?

얼마 전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란 책을 읽고 정말 새로웠다. 위화(余華)란 중국 젊은 작가가 쓴 장편소설인데 한 때는 흠뻑 빠져 이 작가의 책이 나오면 서점에 연락을 달라고 해서 바로 달려갔을 정도이다. 요즘식 표현을 하자면 광팬이었다.

1960년생이니 올해 겨우 오십을 넘었으나 십 년 전쯤 그의 책을 만났다. 나이로 보아서는 애송이었지만 이야기꾼으로서는 내 생각으로는 당대의 최고이다. 이 사람 작가가 되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갓 스물 넘긴 나이에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우정을 쌓는 일이라고 답했다. 참 솔직하고 재미난 표현이다. 작가의 기본소양은 오래 앉아서 베기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 모양이다.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 어느 해인가 추석선물로 직원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주인공 허삼관은 일락(一樂), 이락(二樂), 삼락(三樂)이란 삼형제를 두었다. 자식 작명(作名)에 무성의함이 배어 있지만 아이가 한 명, 두 명 생길 때마다 기쁜걸 어이하나!

젊은 시절 우연히 고향사람으로부터 피를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알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피를 판다. 피를 팔아서 여자에게 환심을 사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아뿔싸, 첫째 아이 일락이가 결혼 전 마누라의 실수로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어지러운 분탕 한번으로 끝냈다. 다행히 삼형제의 끈끈한 우애를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일락이가 간염에 걸려 수술을 받을 때 또 피를 판다. 하지만 마음 속의 갈등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일락이를 보고 이런 말로 화풀이하는 대목이 나온다. “가고 싶으면 가라 이놈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너를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널 십 년이 넘게 키워 주었는데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것이다. 내세에서도 죽어도 네 애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없는 형편에 친자식도 아닌 아이를 키우자니 한이 맺혀 마음속에 사무쳤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락이가 조심스럽게 “우리 국수 먹으로 가요”하자(그 때 국수는 그들의 형편에 사치스러운 외식이었다) 물끄러미 일락이의 얼굴을 보더니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이 평범한 부자간의 대화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유치한 표현이지만 기른 정이 낳은 정을 포용한 것이다. 일락이가 간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자 의사에게 눈물로 하소연한다. “저야 모래면 쉰이어서 세상사는 재미는 다 누려보았지요(피를 팔아야하는 처지에 무슨 재미를 누려봤을까?)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만 그런데 제 아들 녀석은 이제 스물 한살이어서 사는 맛도 모르고 장가도 못 들어봤으니 사람노릇 했다고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지금 죽으면 안 됩니다 얼마나 억울할까요 살려주십시오.” 이 대목에서도 한참 눈을 감았다.

요즈음 낳은 정, 기른 정이 드라마에서 자주 다툼을 한다. 당사자가 아니어서 섣부른 결론은 못 내리겠지만 어쨌든 허삼관은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온 부처이며 예수였다.

일독(一讀)을 권하고 싶다. /김기한 객원 논설위원·前 방송인 예천천문우주센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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