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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난다 <2>

세계문화유산 등재 우선 추진대상 선정

 

 

 

 남한산성은 백제 때 처음 성곽이 축조되고 조선시대에 와서 지리적 중요성이 인식돼 인조 때 산성을 새로 쌓았다.남한산성은 청나라 20만 대군과 40일 동안 항전한 역사의 현장이며 최근에는 수도권 남부의 손꼽히는 등산로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남한산성이 전면 복원되고 복원 과정에서는 통일신라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창고시설도 확인돼 남한산성이 지닌 역사성과 함께 다양한 성격의 문화유산의 가치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특히 지난 2월 문화재청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 우선 추진 대상으로 선정됐다.

이에 경기신문은 경기문화재단과 300년 전 계획된 산성도시 남한산성의 업적을 재조명하고,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 사업 현황과 노력 과정을 총 7회에 걸쳐 짚어본다.<편집자주>

 

2. 삼남지방 연결 혈로 확보 ‘신남성’

남한산성은 서쪽의 청량산(淸凉山, 해발 497m)과 북쪽의 연주봉(連珠峯, 해발 466m), 동쪽의 망월봉(望月峯), 벌봉(해발 514m) 등을 연결해 쌓은 대규모 산성이다.이 산성에 대해서는 지난 1986년 한양대학교 박물관과 지난 1999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에서 두 차례 지표조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이후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동 기관에서 모두 8차례의 행궁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행궁은 인조 2년(1626)에 지어졌으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극심한 훼손이 이뤄졌으며 현재는 발굴결과를 토대로 정비복원이 완료된 상태다.

산성의 평면 형태는 동서방향을 자축으로 하는 불규칙한 장방형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 지역이 많으나 성의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면적은 약 2.3㎢에 이르고 45개의 연못과 80여개의 샘이 있다. 또한 동쪽의 엄미리 방향으로 침식협곡이 발달해 문자의 수송이 수월, 천연 요새로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

더불어 남한산성은 팔당지역에서 한강하류에 이르는 넓은 수계가 영향권에 들어와 내륙 수운을 장악할 수 있고 한강 이북의 아차산 일대와 불암산, 인왕산까지 조망이 가능해 산성의 서쪽에 개설된 교통로인 좌로(서울∼부산간 간선도로)를 통제하는 등 남쪽으로부터 한양으로 가거나 북쪽으로부터 한양 이남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할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신남성(新南城)의 구조와 수습유물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과 광주시 경계에는 검단산(해발 534.7m)이 솟아있다. 이 산은 남한산성의 남쪽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정상에는 남한산성의 부속 방어시설인 신남성 서돈대(西墩臺)와 동돈대(東墩臺)가 있다. ‘중정 남한지’에는 두 돈대가 영조 28년(1752)에 유수 이기진(李箕鎭)의 건의로 이듬해 수축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남성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이곳을 점령해 대포 7, 8문을 앉혀 놓고 방포했던 곳이라 전한다.

이와 함께 돈대가 위치한 신남성은 남격대(南格臺)라고도 하며 원성(元成)과 마주하기 때문에 대봉(對峰)이라고 부른다. 검단산 정상은 동서 방향으로 3개의 봉우리가 올라와 있는데, 중앙 봉우리가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서쪽 봉우리가 높다.

신남성 동돈대는 검단산의 정상부인 중앙봉우리에 설치돼 있다. 서쪽의 봉우리(해발 532.5m)에 축조된 것은 서돈대라고 부른다. 두 돈대간의 거리는 235m 정도다.

서돈대는 남한산성 동쪽의 한봉과 함께 산성의 방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점이다.

신남성 동·서동대의 수습유물로는 주변의 현상변경으로 인해 소량의 유물이 지표상에서 관찰될 뿐이다.

기와류와 전돌류 등이 발견되는데 시기는 조선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서돈대 내부에서 고려시대 기와편이 한점 확인돼 이번시기 유구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될 예정이다.

 

 

 

 

 

 

◆신남성과 남한산성 방어체계 변화

호란을 겪은 이후 조정은 남한산성의 방어체계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시도한다.

이에 따라 남한산성의 모습은 변화를 예고하게 된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은 홍이포와 같은 공성무기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후 조선은 조총과 화포를 주로 하고 궁시와 창·검은 보조무기로 전락했다.

성곽의 방어에서는 화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화포의 적극적 도입은 병자호란 당시 홍이포를 응사해 천지총통을 발사한 전투 경험에서 비롯됐다.

화약병기의 발달에 따라 남한산성에는 봉암외성, 포루, 돈대, 옹성 등을 증축했고 문루와 장대를 축조했다.

병자호란 이후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성벽의 보수 및 원성에 대한 증개축과 함께 이뤄졌다. 이때 남옹성 3개가 신축되고 연주봉옹성을 비롯해 4개의 옹성에 포루가 설치됐을 것으로 추전하고 있다.

이후 많은 수축작업이 이뤄져 영조대에는 세번의 큰 수축 공사가 이뤄졌고 정조 3년(1779)에는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작업이 벌어져 기와로 쌓았던 여장을 벽돌로 교체했다.

남한산성의 대한 수축과 별도로 외성에 대한 축성도 본격화 됐다.

원성 외에 성 바깥쪽에 덧붙여 쌓은 외성들은 모두 병자호란 이후 축성됐다.

남한산성의 외성은 숙종 12년(1686)에 쌓은 봉암성, 숙종 19년(1693)에 쌓은 한봉성, 숙종 45년(1791)에 쌓은 신남성의 곳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새로 쌓은 신남성은 제7암문에서 남쪽으로 검단산 정상부에 있다.

신남성은 남격대 또는 대봉이라고도 불려왔다. 숙종에 민진후의 주장으로 성을 새로 쌓았다. 이후 영조 28년(1750)에 서돈대와 동돈대가 함께 수축됐다.

민진후가 검단산 정상에 쌓은 성은 천여명의 군사로도 감당하기 힘들고 땅이 높고 성첩이 최락했으므로 돈대를 쌓아서 지키자는 의견을 올렸다.

 

 

 

 

이에 영조는 지형과 돈대를 그림으로 그려 보고하도록 했다. 이기진이 그려 올린 지도를 검토한 영조는 돈대의 축성을 지시하게 된다.

영조대에 수축된 신남성은 정조대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과정에서 마지막 수축됐다. 정조는 남한산성 수축 후 이곳에 방문해 산성과 주변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보고받게 된다.

이때 함께 있던 수어사 서유방과의 문답을 보면 신남성에 대한 마지막 수축이 정조 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한산성의 외성이 축성된 봉암, 한봉, 검단산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점령당한다.

이에 따른 화포공격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성안의 사정이 적에게 훤히 드러나면서 회맹을 위한 협상과정에서 상당히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당시 조정에서 가졌던 산성 방어의 요점은 적에게 노출된 고지에 대한 방어를 통해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지금의 신남성이 자리 잡은 이현봉을 확보함으로써 삼남지방과의 통신 및 지원 물자의 보급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남성은 외 3성 가운데에서도 적에게 노출된 고지에 대한 장악과 삼남과 연결되는 혈로(血路)를 확보한다는 목적으로 볼 때 남한산성 수축의 핵심적인 요소로 부각됐다.

남벽에 대한 방어력 강화가 엿보이는 부분은 남옹성의 수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을 두고 이 가운데 연주봉옹성과 장경사신지옹성을 제외한 3개의 옹성은 남벽에 집중하고 있다. 남벽의 3개 옹성들이 신남성과 두 돈대와 상응하고 있다는 점은 남한산성의 수축과 신남성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방어시설들은 모두 화포, 즉 화약병기를 활용한 방어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 성곽의 발달과정에서 화포의 활용과 그것을 통한 성곽의 진화과정을 살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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