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으로 거듭난다 <3>

세계문화유산 등재 우선 추진대상 선정

 

 

 

남한산성의 성곽은 조선 인조 2년(1624) 원성(元城)을 완공했으며 숙종12년(1686) 봉암성, 숙종 19년(1696) 한봉성, 그리고 숙종45년(1719)에는 신남성을 축조했다. 또 영조 15년(1739)에는 한봉성을 개축했고 20년(1744)에는 원성을 중수했으며 영조 28년(1752)에 신남성 돈대를 쌓았다. 

 

 

 3. 성곽과 관아시설의 지적 변천

120여 년간에 걸쳐 완성된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9천973보(步)(3만2천968㎡), 여장(女墻·성위에 낮게 쌓은 담)이 3천48개, 옹성 5개, 대문 4개, 암문 16개, 지당(池塘·넓고 오목하게 팬 땅에 물이 괴어 있는 곳) 45곳, 우물 80개소, 물레방아 8개 등을 갖추게 됐다.

뿐만아니라 인조 4년(1626) 기존의 산성을 개축하고 광주부의 읍치를 성내(城內)로 옮겨졌으며 왕이 거처할 행궁과 객관인 인화관도 함께 건립했다.

그리고 산성내의 군사, 행정 등을 담당하는 관아시설을 설치하고 산성을 유지·관리하기 위한 개원사, 장경사 등 사찰을 창건했다.

▲원성과 외성

조선시대에 들어 광해군13년(1621)에 처음 산성을 쌓았으며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개축했으며 정조 3년(1779)원성을 수축했다.

‘중정 남한지’에 나타난 산성의 규모를 살펴보면 원성은 내부 둘레가 6천297보(2만816㎡)로 17리반(6.8㎞)이고 바깥 둘레는 7천295보(2만4천115㎡)로 20리(7.8㎞) 95보(314㎡)이며 자(尺)으로 환산하면 2만3천660자(7.1㎞)였다.

여장은 1천940개이고 문(門)은 4개인데 모두 누(樓·망루)를 건립했다.

옹성이 4개이고 암문이 9개, 군포(軍鋪)가 125군데인데 각 3칸 규모라고 하였으며 또한 사방에 장대를 세웠다.

그리고 봉암성(蜂巖城)은 숙종 12년(1686)에 부윤 윤지선(尹趾善)이 쌓았는데, 둘레가 962보(3천180㎡)로 7리(2.7㎞)가 되며 여장이 294개, 암문이 4개, 군포가 15군데였다. 또한 한봉성(漢峯城)은 영조15년(1739)에 개축했는데 둘레가 895보, 여장이 272타라고 했으며, 남격대(신남성)는 숙종이 45년(1719)에 개축했는데 둘레가 743보, 여장이 238타라고 했다.

 

 

 

 

 

 

▲장대와 옹성

‘중정 남한지’의 장대와 옹성을 살펴보면 동장대는 동문안에 북장대는 북문안에 있었다.

서장대는 영조 27년(1751) 당시 유수가 대(臺)위에 루를 세웠으며 내부 편액은 무망루(無亡樓),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라 했다.

남장대는 정조 12년(1788)에 대의 상층에 누를 세우고 타운루(唾雲樓)라 편액(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을 올렸다.

남옹성은 3개인데 1옹성은 둘레가 344보(1천137㎡)에 여장이 109개이고 2옹성은 둘레가 276보(912㎡)에 여장이 87개이며, 3옹성은 둘레가 98보(323㎡)에 여장이 31개였다.

그리고 연주옹성은 둘레가 231보(763㎡)에 여장이 37개이며, 장경사신지 옹성은 둘레가 127보(419㎡)에 여장이 40개였다.

남한산성은 읍치를 둘러싼 원성, 그리고 원성과 연결된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으며 원성의 남쪽에는 남격대라고 불리는 신남성이 축조돼 있다. 산성에는 4개의 문과 16개의 암문이 있고 군포가 115 혹은 125군데 있으며 성의 동남에 포루가 있다. 또 원성의 주변에 옹성이 있는데, 남쪽에 3개를 비롯해 연주봉성과 장경사신지옹성이 축조돼 있으며, 또한 사방에는 장대가 설치돼 있다.

◇관아시설

광주부 읍치(고을 수령이 일을 보는 관아가 있는 곳)가 남한산성으로 이전하면서 성내에는 행정 및 군사운영을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요한 곳에 들어섰다.

정조 19년 수어영(조선시대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 남한산성으로 영구히 출진하기까지 광주 부윤과 유수의 승강, 그리고 수어청(조선 후기에 설치된 중앙 군영) 경청의 설치와 혁파 등에 따라 관아의 관제및 시설에 변화가 있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광주부, 즉 유수가 아닌 부윤이 경기방어사와 토포사 및 전영장을 겸하던 시기의 공해는 행궁 231칸, 좌전 29칸, 우실 4칸, 군향창사 924칸, 객사 36칸, 관아 123칸, 향청 16칸, 주사 11칸, 작청 27칸, 군기청 12칸, 관청 11칸, 종각 6칸, 형옥 21칸 등 이였다.

이때에는 행궁시설을 제외하면 다른 지방군현과 유사한 시설들로 구성됐음을 알수있다.

정조 19년 수어청이 남한산성으로 완전히 출진해 즉 광수유수가 수어사를 겸하는 일원체제로 변함함에 따라 수어영과 이가가 같은 곳에 함께 배치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이후 정비된 광주유수부의 관아시설은 행궁영역과 남한산성으로 출진한 수어청 영역 또 유수부의 일번 행정을 위한 이아 영역 등으로 구분된다.

 

 

 

 

▲수어영(조선시대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

조선후기 광주부 읍치에 관아시설은 1871년경에 작성된 광주부읍지와 1899년 전국읍지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광주읍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수어영, 소속 관아로는 과거 연무당 연병관이라 하다가 정조 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친 수어영, 그리고 비장청, 기패관청, 일청,초관청,아병장관청,중영군관청, 별파진청,서리청,순령군청,취수청,군뢰청,훈도청,세락수청,관노청,승도청,집사청 등이 수어영을 구성하는 관아였다.

▲이아(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의 곳의 군아)

이아 영역의 대표적인 건물은 제승헌으로서 영조25년에 부윤 남태온 건립했으며 판관의 내아는 정조 10년에 세웠다.

읍지에 타난 이아의 관아시설로는 제승헌을 비롯해 내아, 향청, 작청, 종각, 지구청, 이청, 속오장관청, 포도청 등이 이아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26칸 규모의 본부이사가 있는데 1796년 이아의 내아를 신축하면서 행궁의 우측으로 내아 건물을 옮겨서 지었다.

17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한 산성도에는 이아가 행궁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 처음에는 행궁의 남측에 조성됐다가 영조 13년울 전후해 수어영 뒤편으로 이전됐음을 알수 있다.

▲창고

조선후기 남한산성 내에는 관아의 창고와 군영의 창고가 여러곳에 배치돼 있었다.

증정 남한지에 기록된 산성내의 창고는 영창 201칸, 동창114칸, 그리고 수창, 승창, 별고, 보휼고 등이 나타난다.

이외에도 구남창 78칸, 신남창 81칸, 신풍창 105칸, 별창 87칸, 신북창 141칸, 구북창 117칸 등 군량미를 보관하는 창고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철되고 저장된 곡식도 없다고 했다.

더불어 영고, 보향고, 성기고, 영고, 보휼고, 별고, 보향고, 구군기, 신군기 등이 기록돼 있어 조선후기 산성 내에 유지되었던 창고시설을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다.

한편 관아의 행정시설은 아니지만 조선후기 모든 군현의 읍치에는 1개 이상의 장시가 설치되고 있었는데 읍지에 개설됐던 장시는 대게 사람들의 왕래와 물자의 수송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교통의 중심지에 집중적으로 개설됐다.

남한선성의 경우는 연무관 전면의 넓은 공지가 읍지의 유일한 광장으로서 성내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