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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이정한 ㈜백양CMP 대표

철판가공분야 鐵女 등극

 

“사업가는 이익이 크지 않더라도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장기적인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여성적인 마음은 가슴에 새겨두되 부드럽고 섬세한 점을 경영에 활용해야 한다”
 글|홍성민기자 hsm@kgnews.co.kr

 

 

무협지 작가서 사업가로 성공적 변신
중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노벨 문학상을 꿈꾸던 소녀 이정한. 유난히 노란색을 좋아해 노란색 차를 타고 노란색 코트에 노란색 양산을 들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가진 소녀는 지금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금녀(?)의 사업영역인 철판 가공분야에서 20여년 간 수 많은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이정한 대표(49·㈜백양CMP)는 이제 4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한 기업의 대표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경기도 여성 CEO를 대표하는 한국여성경제인협회 경기도회 회장직을 겸하고 있는 이정한 대표의 삶의 스토리를 들어본다.

 

중국식 가명 쓰며 무협지 작가로 수년 간 활동
이정한 대표의 고향은 충남 아산이다. 엄하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뿌리’에 대한 중요성 늘 잊지 않는다는 이 대표가 좋아하는 작가는 박경리, 톨스토이 등이다.
특히 일본의 전설적인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를 동경해 그의 작품인 ‘대망’을 유년시절 5번을 넘게 통독했다고. 이러한 이 대표의 성향은 회사의 경영방침에서 엿볼 수 있다.
 

 

사람의 기질과 성격을 파악해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즐긴다는 이 대표는 책을 통해 좋은 인간 관계가 어떠한 효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현재 백양CMP가 모든 사안을 전사적으로 처리할 수 있던 응집력은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대표가 처음으로 직장을 잡은 곳은 무협지를 만드는 회사였다.
당시 중국에서 번역한 무협지가 한창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중, 고등학생은 물론 성인들에게까지 무협지 열풍이 몰아쳤던 시기로, 이 대표는 중국식 가명을 쓰며 무협지 작가로 수년 간 활동했다.

 

이 대표가 무협지 작가를 포기한 이유는 결혼이다. 특히 사업하기를 원했던 남편을 따라 자의가 아닌 타의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뛰어들었다. 
1988년 이 대표는 퇴직금과 집을 팔아 마련한 돈으로, 파이프 및 철판 등의 원재료를 유통하는 대리점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상호는 백양 스테인레스 상사로, 지금의 백양 CMP의 뿌리인 셈이다.  

 

사업은 시작하자 철판 가공 재료에 대한 공급부족의 기류를 타고 금방 성장세에 들어갔고 경쟁업체도 많치 않았다.
사업을 시작한지 불과 1년 후. 이 대표는 기존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방향을 급전향한다. 원자재 유통 보다 완제품을 만드는 제조업의 마진이 10배 이상 크다는 것을 사업 1년만에 깨달은 것이다.
유통업을 통해 얻은 수익은 모두 기계설비 및 인력 등의 마련하기 위해 고스란히 재투자했고, 공장 부지 등을 얻기 위해 또다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모험이었죠. 하지만 제조업으로 전향을 결정하지 않으면 큰 후회를 남길 것 같았습니다. 작가의 꿈을 버린 이상 작은 꿈에 만족하는게 싫었다”고 이 대표는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호황만을 누릴 줄 알았던 사업에 위기가 찾아왔다.
사람을 너무 좋아했던 남편이 사업에 집중하지 못하면서 거래처로부터 신뢰를 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결혼생활에도 문제가 발생했고, 결국 사업 시작 4년만인 2002년 이 대표는 남편과의 이혼을 선택했다.

 

 

부도…자살 시도…재기
이혼 후 남편이 사업 운영권을 포기하면서, 이 대표는 홀로 사업체를 운영했다. 워낙 꼼곰하고 성실했던 이 대표는 매년 2배의 성장세를 달성하며, 전화위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자가 운영하는 업체라는 차별은 이 대표가 넘어야 할 큰 장벽이었다.
“거래처에 들어가면 기업의 대표가 아니라 보험 아줌마 취급을 당했어요. 더욱이 중성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여자보다 남자일 거라는 오해가 많아, 문전박대 당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 대표는 남들보다 한발 더 거래처를 자주 찾고, 약속을 깨지 않는 다는 신뢰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더욱이 직원들에게는 치마를 입은 상태로 고장난 탱크 밑으로 들어가 직접 수리하는 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몇년 간 안정세를 누리던 백양CMP는 1990년 중반 큰 위기를 겪었다. 건설관련 거래처로부터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연쇄위기를 맞았던 것.

 

이 때 받지 못한 돈은 5억원 정도로 당시 102㎡(31평) 정도의 아파트 한채 값이 1억을 조금 상회한 것에 비교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가족뿐 아니라 친척, 친구 들이 집을 담보로 잡혀가며 자금을 빌려주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힘들게 만들었단 사실에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이 대표는 회사 인근 오이도 앞바다를 찾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버릴 결심을 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뛰어내릴려니 너무 무서웠다. 검푸른 바다가 무서웠던 것이 아니라 여기서 무너지면 남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지금까지 보낸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이 날의 마음가짐은 이 대표에게 다음날의 태양을 볼 수 있게 해주었고 또다시 재기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

 

한번의 큰 위기를 겪은 후 이 대표는 더이상 건설관련 업체들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는다.
더욱이 산업기계, 수출, 반도체 장비 등 여러 분야로 사업을 분산시켜 위기에 강한 기업으로 백양CMP를 한단계 성장시켰다.
이 대표는 “이 때 겪은 부도로 백양CMP가 한층 더 강한 기업이 됐다. 모든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IMF 때에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게 해주었다”고 전했다.  

 

여직원들도 용접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로 육성
백양CMP가 강한 이유는 사원들이 전사적으로 모든 업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구내 식당 아줌마부터 사무실 여직원까지 남자들이 담당하는 용접을 배우게 했다.
한가지 일에 집중하고 전문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유연하게 모든 일에 대처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돼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여름 여직원들에게 용접 교육을 실시했는데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눈이 충혈되면서까지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고 코 끝이 찡했다”며 직원들에 대한 자긍심을 나타냈다.
이러한 직원들의 응집력 뒤에는 이 대표의 헌신적인 배려가 있기에 가능했다.
직원들의 식사를 직접 만들어 대접한 한 것은 물론 지난 2000년 초에는 아예 사장실을 없애고 장소가 협소했던 구내식당을 확장시켰다.

 

직원들의 급여 역시 직원들이 모두 담당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간의 발생할 수 있는 이질감을 피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은 이 대표의 이러한 마음을 알기에 터무니 없는 급여를 요구하는 일이 없다. 특히 직원 스스로 기업의 상황에 따라 급여를 유동적으로 조정해 애사심과 책임감이 더욱 커졌다. 이 대표는 이러한 자신의 경영철학을 끝까지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이 대표는 사업을 시작하는 단계의 여성 CEO들에게 작은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사업가는 이익이 크지 않더라도 또는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장기적인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더욱이 여성적인 마음은 가슴에 새겨두되 부드럽고 섬세한 점을 경영에 활용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다만 이러한 것에 노하우는 없다. 나의 있는 그대로를 거짓없이 보여주는 것이 지금까지 내가 얻은 사업적 경험이다”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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