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특별인터뷰]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표 결집력 강한 손학규 대표 가장 강력한 야권 후보”

고향 거제에 사무실 내고 총선출마 위해 몸만들기 나서

정권이 바뀌면서 이어진 두 번의 납치사건 미제사건으로 남아



대통령의 아들로서 문민정부 5년간의 영광 이후 5년간의 굴욕을 겪으며 급기야 구속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도피나 타협보다는 정면 대응을 택했다. 지난 10여년간의 세월을 음지에서 보내며 시시각각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자아의 신화를 향해 묵묵히 전진하고 있는 연금술사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이제 재기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내년 치러질 19대 총선을 앞두고 아버지의(김영삼 전대통령. YS) 고향인 거제시에서 출마를 서두르고 있는 여의도 연구소 김현철 부소장을 만나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짚어보고 그가 겪어야 했던 고충들을 들어본다



글 l 박상돈 부장 psd@kgnews.co.kr 사진 l 이준성 기자 oldpic316@kgnews.co.kr

김현철부소장은 사실 원내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수차례에 걸쳐 주어졌으나 본인의 거절과 예의치 못한 불운으로 불발에 그쳤다. 정치인 김현철이기 이전에 그는 감성과 인간미가 넘치는 김현철이었기에 정치판에서 불운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29살 시절 YS로부터 13대 총선 출마 제의

1988년 그의 나이 29살이던 풋풋한 시절 YS로부터 13대 총선에 출마를 강력하게 주문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준비가 않됐다”는 핑계로 YS를 달래고 다음 기회를 약속했던 것이다. YS로부터 제안받은 지역구인 부산 사하구는 서석재의원의 지역구였기 때문에 김 부소장은 차마 인간적으로 결단을 내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

YS가 대선에 출마한 1992년 김 부소장은 YS의 지역구인 부산 서구에 애착을 갖고 출마의 기회를 노렸으나 민정계 곽정출의원에게 공천을 빼앗기는 불운을 겪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6년 김 부소장은 ‘하고싶은 이야기 듣고싶은 이야기’란 에세이집을 통해 거제를 지역구로 출마의 전략을 세워 출마의지를 다졌다.

그당시 거제는 김봉조의원의 지역구였다. 김 의원이 이 전략을 거부해 김 부소장은 또 한번의 불운이란 쓴맛을 보아야 했다.

김 부소장은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솔직히 아버님이 대통령이었는데 나섰으면 안될일이 어디있겠느냐(쓴웃음을 지으며)”며 뒷말을 이어 가지 않았다

이렇듯 김 부소장은 YS 아들이란 숙명적 인연으로 문민정부에 깊이 얽혀있으면서도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존재라 ‘오페라의 유령’처럼 무대뒤에서 YS의 그늘을 지킬수 밖에 없었다. ‘YS의 아들’이란 꼬리표와 ‘YS의 그늘’이 김 부소장에게는 상당한 불이익으로 작용한다는 냉정한 정치판에서도 김부소장은 “YS의 그늘은 아버님의 높은 정치역정으로 평가하고 한국정치사에서 아버님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에서는 깊은 효심을 엿볼수 있었다.

불이익을 장점으로 승화, 정치의 선구자라는 닉네임 얻어

오히려 자신의 불이익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김 부소장만이 엮어나가는 연금술사를 구사해 현재는 정치의 선구자라는 닉네임을 선사 받은거 같다. 이렇듯 수차례 원내진출의 기회를 불운으로 잃었던 그는 문민정부의 막을 내리며 평민으로 돌아온 그에게 예의치 않았던 시련이 찾아오게 된다.

평소 등산을 즐기던 그는 1998년 지인들과 등산을 약속하고 등산을 하기위해 자신의 차로 집을 나서 약속장소로 이동하던 중 9명의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는 극한 상황에 처해 졌다.

그 상황에서 김 부소장은 차안에서 괴한들과 필사의 몸싸움을 구사하자 차는 속도를 줄이며 김 부소장을 제압하려 할때 기적적인 탈출에 성공하며 경찰에 신고를 했다. 범인들이 모두 검거되고 조사를 마쳤으나 납치 이유에 대해선 설득력이 부족하게 사건은 마무리 됐다.

그러나 김 부소장은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것은 아니다”며 사법기관에 이들을 석방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인간미를 보였다.

그것도 잠시 김 부소장이 미국생활을 하던 지난 2000년도 5월경 평소대로 아이들을 학교까지 태워주고 돌아와 자택으로 들어가는 순간 15명 정도의 괴한들로부터 기습적인 습격을 받아 자택에 감금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괴한들은 당장이라도 죽일듯이 김소장에게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위협을 가했으나 부인이 이 괴한들의 시선을 유도하는 순간을 이용해 비상구를 통해 극적인 탈출로 이웃으로 피신해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은 결국 미궁으로 빠지고 귀국길에 오른 김부소장은 후에 이성헌의원을 통해 “그 괴한들은 김 부소장이 DJ 비자금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그런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보사건에 뒤 이은 구속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

이러한 공포는 김 부소장의 의지를 꺽기엔 너무 약했다 오히려 그의 의지를 자극시키기만 했다. 급기야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보사건에 뒤 이은 그의 구속은 그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견디기 힘들어 했던 시간들이다. 2평 남짓한 그만의 작은 공간에서 김 부소장은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2003년 그의 나이는 어느덧 마흔다섯.....한 여자의 아내와 세 아이의 가장인 그는 다시태어 났다. ‘김영삼 총재의 둘째아들’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아들 영식’으로서가 아니라 김현철이라는 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며 세상에 공표한게 ‘너무늣지 않은 출발이기를’ 이란 제목으로 펴낸 에세이집이다.

지난 10여년간의 세월을 음지에서 묵묵히 보내야 했던 시간들과 그가 살아온 40여년의 성장과정까지 고스란히 정렬된 215쪽의 에세이다

김현철 부소장은

△ 1959 서울 약수 출생 △ 1978경복고졸 △ 1984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 1986 미국 남가주(USC)대학 경영학 석사학위(MBA) △ 1997 고려대학교 경영학 박사학위 △ 1988~90 중앙여론조사연구소 소장 △ 1996-97. 유엔한국청년협회(UNYA) 회장 △ 2000-01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학 객원교수 △ 2001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현) △ 2003 거제미래발전연구소 소장(현) △ 2002 세계화와 21세기 국가경영 출간

“박근혜 대세론 분명 한계에 봉착할 것”

4 .27 재.보궐선거가 한나라당 참패로 끝났다.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책임 또한 한나라당에 있다. 여론조사의 예측도 쉽게 가늠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여의도 연구소에서 여론조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 부소장과의 인터뷰는 선거전에 이뤄졌지만 당시 여론조사를 근거로 분당을에서는 한나라당 당선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 예측은 빚나갔다. 김 부소장에게 각종 정치현안에 대해 물었다.

- 여러번의 총선도전이 좌절되었는데요 17, 18대는 여론과 한나라당의 당헌당규에 의해 그랬습니다. 정치를 통해 구현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치에 대한 꿈을 꿔 왔지만 좌절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정치를 통해 인적 네트워크 갖추는게 목표입니다. 정치권 안과 밖의 사람들을 묶어 당이 나아갈 방향과 또 같은 공동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정부가 추진하는 세계속의 선진화를 달성할 수 있고 평화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치에 대한 궁극적임 목표점은 ‘경제, 복지’를 지향하는 국가 어젠다 설정입니다. 이를테면 자유경제원리를 기반으로 국가가 성장해야 일자리도 창출되고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수 있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복지를 추구하겠다는 것입니다”

- 내년 총선전까지는 대선후보가 결정되기는 힘들것으로 보이는데 공천권을 현 집권측과 유력 대선후보 어느쪽에서 행사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14대 총선(1992년)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3당 합당이후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후 아버님은 총선공천권을 과감하게 민정계에 넘겼습니다. 당시 민정계에서도 ‘통큰 결정’이라며 반겼고 이정도라면 믿을만 하다며 아버님의 대선 선거전에 전적으로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좋은 예라고 봅니다”

- 한나라당 대선 후보군이 어떻게 정리될 거라고 보십니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박근혜 전 대표의 대세론이 한계점에 다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재로서는 다소 거품이 끼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절대적 지지세력이 20%대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안티세력도 만만치 않게 작용할 겁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충돌도 그렇구요. 세종시 문제를 봐도 그렇습니다. 박 전대표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충청권에서 절대적인 지지세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충북지역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 지지세가 높고 충남권은 민주당 지지세가 확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종전 이회창 대세론이 무너지듯이 박 전대표의 경우도 표확장력에 한계가 있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 현재 한나라당내 대권후보군으로 봤을 때 누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대권은 흥행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현재의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박근혜 전 대표가 부동의 1위를 달리고 있지만 거론되고 있는 인물가운에서도 경쟁력 있는 후보군이 더 합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몽준, 이재오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김문수 경기지사도 그렇고 총리후보에서 낙마한 김태호 전 경남지사도 이번 재.보궐선거결과에 따라 새 후보군으로 등장할 신무기에 해당합니다”

- 국민참여당 유시민 대표가 대선 결승에서 맞붙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는 않습니까.

“유시민 후보는 호불호가 강한 분입니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역시 표 확장성에 한계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지지세력과 안티세력이 너무 강하게 대립하는 것이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어느정도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고 또 대민접촉에 강한 손학규 대표의 표결집력이 무시할 수 없는 대안이 될 거라는 예측을 해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 거론되는 인물인 김두관, 유시민, 손학규 중에서도 손 대표가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봅니다”

- 재.보궐선거이후 한나라당의 지도체제가 변화될거라는 얘기가 있는데요.

“당장 5월에 원내대표 경선을 치러야 하는 정치일정이 놓여 있습니다. 내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어느때보다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재오 계의 안경률 의원과 이상득계의 이병석 의원, 그리고 박근혜 계의 황우여 의원, 중도계의 이주영 의원이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년 총선 공천권을 확보하기 위한 물밑 접촉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음이 감지됩니다. 총선에서 많은 의석을 확보하고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인물을 원내대표로 뽑는것이 중요하겠지요”

 

 

- 19대 총선 거제출마는 결정하신 건가요.

“이제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겠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거제에 사무실도 내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거제는 노동자들이 많아 변수가 있겠지만 한나라당 강세지역으로 분류됩니다. 공천이 된다면 잘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단일화는 선거때마다 야권이 들고 나오는 무기가 되었는데 선거법을 개정해서라도 이를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지방선거에서는 야권이 후보 단일화로 재미를 보기는 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는 비례 득표율에 의해 한석이라도 차지하기 위한 각 당의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때문에 단일화가 쉽지는 않을겁니다.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여집니다”

- 문민정부 황태자, 소통령이라는 표현이 걸리지는 않습니까.

“당연합니다. 소통령은 한때 야권이나 민주당쪽에서 저를 깍아 내리기 위해 지어낸 말입니다. 아버님의 아호가 큰산이라고 해서 거산(巨山)입니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저를 소산(小山)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문민정부 황태자니 소통령은 좀 과장되고 저를 무력화 시키기 위한 표현입니다. 김영삼 아들이 아닌 자연인 김현철로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이제는 그런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네이버에 ‘김현철’을 치면 가수와 개그맨 김현철 얼굴이 뜬다. 정치인 김현철은 한참을 내려가야 홈페이지로 연결할 수 있다. 대통령의 차남으로서 권력의 맛을 누려보았을 그에게서 그나마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은 거제선거에 출마한다면 유권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야 하는 숙명때문일까. 1998년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여의도 정가를 떠났던 김현철씨는 2008년 10월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여의도 연구소는 아버지 YS가 지난 1995년에 만든 것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