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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 최연식 기자의 사막체험기

동서 실크로드 신장 우루무치에서 돈황(敦惶)까지

 

 

 

사막(沙漠)은 황량하다. 내가 사는 땅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곳이기에 기회가 되면 꼭 다녀오리라 맘먹고 있었다. 더구나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신장 위그루 자치구는 저 먼 옛날부터 동서(東西) 문명의 교차지역이었고 일명 ‘실크 로드’라 불렸다. 신라시대의 고승 혜초(慧超)가 이 길을 따라 인도를 다녀 온 기록이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인 바, 이 기록이 발견된 돈황의 석굴을 볼 겸, 우루무치와 돈황에 이르는 여행길을 택했다. 이에 9일간의 여감(旅感)을 간략히 기술한다.

글|최연식 부국장 cys@kgnews.co.kr



바다와 가장 먼 곳 우루무치

지난 8월 말경 중국대륙에서 가장 넓은 자치구인 신장 위구르로 향했다. 신장지구는 중국대륙의 1/6을 차지할 정도로 넓지만 대부분이 사막지대다. 신장의 성도가 우루무치인데 때마침 여름 휴가철을 맞아 서울에서 우루무치까지 전세기가 운항 중이었다.

금년 중에는 마지막으로 운항하는 항공편이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면 서안이나 북경 등을 통해서 가야하기에 서둘러 계약을 하고 우루무치로 향했다.

우루무치는 위구르어로 ‘아름다운 목장’이라는 뜻이라는데 외견상으로는 여느 현대도시를 닮아 있었고, 실제 푸른 초원이 있는 목장을 보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벗어나 황량한 사막을 서너 시간 달린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우루무치는 예부터 서역이라 불렸던 지역으로 바다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도시이며, 남쪽으로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곤륜산맥에 닿아 있고 서쪽은 실크로드의 오아시스였던 인닝을 지나 러시아와 파키스탄으로 이어진다.

지난 8월 27일 인천공항을 이륙해 약 4시간 30분의 비행 끝에 우루무치 공항에 도착하니, 현지 시간으로 밤 11시 30분경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새벽 1시께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 됐다.

우선 우루무치의 시내에 있는 홍산공원에 올라 우루무치 시내전경을 조망 했다. 공원에는 현지인들이 나와 중국 고유의 운동을 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띠었고, 이름모를 붉은색 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산책겸 공원을 돌아본 후 2시간여를 달려 남산목장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남산목장은 우루무치라는 지명이 왜 ‘아름다운 목장’인지를 알게 하는 기회가 됐다. 삭막한 사막벌판을 2시간여 달려 기괴한 모양을 한 사막 산들을 끼고 돌고 돌아 당도하니 푸른 숲과 초원이 나타났다.

푹푹찌던 우루무치 시내의 더위는 사라지고 서늘한 한기를 느낄 정도로 고도가 높았다. 먼먼 옛날 사막을 건너온 사람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서역으로 가는 음식과 물을 준비하며 기운을 충전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는 경험을 했다.

 

 

가도 가도 사막 거기 중국의 보물이 있었다.

남산목장을 떠나 본격적인 사막지대로의 여행을 위해 ‘투루판’으로 향했다.

투루판은 위그루어로 ‘패인땅’이라는 뜻인데 실크로드의 요충지에 위치해 동서교역의 핵심적 루트였고 당도 높은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며 손오공과 삼장법사가 서역으로 가며 불과 싸우는 ‘화염산’을 비롯 교하고성 등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투루판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위치한 분지로서 독특한 사막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4시간여를 이동하며 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인간이 살 수 없는 화염지대 그 자체였다. 새파란 하늘, 망망한 사막에 지평선을 향해 뻗은 외길, 이글거리며 내려쬐는 강렬한 태양 그리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사막의 거센 바람......

한참을 이동하다보니 사막 한가운데 끝없이 늘어 선 풍력 발전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잠시 멈춰 화장실도 해결하고 사막바람을 체감했다. 얼마나 바람이 거센지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고 눈을 뜨는 것도 힘들었다.

그곳은 항상 그 정도의 바람이 부는 곳으로 중국은 그 바람을 이용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풍력발전기를 설치했고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설비를 증설하고 있었다.

얼마쯤 가자 차창 밖으로 또 다른 풍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사막 한 가운데서 기름 펌프가 쉬지 않고 원유를 퍼 올리고 있었다.

한 때는 죽음 땅. 불모의 땅으로 불리며 생지옥이라 일컬어졌던 사막이 지금은 중국을 중국으로 키우는 ‘보물섬’으로 불리고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세배에 이르는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니 그저 부럽고 샘이 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 때 이곳이 바다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반대쪽 사막은 염호라 불리는 소금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일직선으로 난 도로임에도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 버스가 속력을 내지 못했다. 의자에 앉아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버스의 진동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투루판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투루판은 한국과의 시차가 1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밤 10시나 되어야 어둠이 내렸다.

한낮에는 섭씨 40도까지 치솟는 열기 때문에 시장의 상가도 모두 문을 닫았고 저녁이 되어 햇살이 약해질 때쯤 거리에는 우리의 포장마차 같은 시장이 서고 사람들이 몰려나와 양꼬치와 여타 음식에 맥주 등을 마시며 왁자한 모습을 선보였다.

중국이라고는 하지만 위그루 족의 모습과 회교를 믿는 종교적 복장 때문에 전혀 낯선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신장지구에서의 테러로 인해 거리 곳곳에 공안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친절했으며 낙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저녁 시장 거리에서 각종 꼬치를 맛보고 남대문 시장 같은 잡화점 등을 둘러보고 투루판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사막에 꽃 폈던 문명과 불교 유적

다음날 투루판 사막지역에 꽃피웠던 문화를 보기 위해 본격적인 투어에 나섰다.

사막을 가로질러 풀 한포기 없는 불타는 듯한 붉은 화염산을 옆으로 끼고 천불동으로 향했다. 약 60km의 거리에 위치해 있는 천불동은 천개의 불교 동굴이 있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많다’는 의미로 천불동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화염산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최고 기온이 섭씨 85도까지 올라간 기록을 갖고 있다니 얼마나 뜨거운 사막 산인가를 알 것 같았다. 붉은 빛을 띠는 암벽들과 새파란 하늘아래 펼쳐진 능선은 마치 붉은 불길이 치솟는 것만 같았다. 가히 손오공의 무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천불동은 화염산 기슭을 파서 만든 동굴들로 동굴 안에는 채색된 부처상과 보살상을 비롯 천상의 문양 같은 아름다운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서무역의 교차점이라는 지리적 이유로 뺏고 빼앗기는 숱한 전란을 통해 불교를 인정하지 않는 회교도들이 벽화를 지우고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모든 인물의 눈을 파내거나 흙으로 덧칠해 거의 전부가 원형이 훼손돼 있었다.

대략 동굴은 83개 정도가 있는데 이들 중에는 불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는 불당, 승려가 휴식하는 승방, 득도를 위한 참선방 등으로 나뉘어 구별되고 있었다.

대략 6세기경부터 조성된 동굴은 14세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훼손되기는 했지만 인류문명의 고귀한 자산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천불동을 둘러보는 동안 살을 데울 것 같은 햇빛과 온 몸에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었으며 그 먼 옛날 수도승들은 무엇을 위해 이 동굴에서 수양을 했는지, 또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으며 수탈당하던 민중들께 무엇을 남겼는지 의문이 들었다.

고래로부터 이어온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까지도 인간에게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유적들을 둘러보며 한결 같이 느낀 것은 종교가 인간 구원이 아닌 종교를 이용한 착취의 근간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스러진 온갖 종교 유적과 현존하는 성당이나 불당들을 보노라면 그 먼 옛날부터 신의 이름으로 기원되어 온 평화와 행복과 구원은 단순한 인간의 소망이었을 뿐, 신은 저 높은 곳에서 그저 미소 지으며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불동 관람을 마치고 다시 투루판 일대에 사막 왕국으로 존재했던 고대 성곽의 흔적들을 찾아 이동했다.

교하고성(交河古城), 고창고성(高昌古城), 고대 고창국과 당나라 시대의 공동묘지였던 아스타나 고분군, 신강 최대의 이슬람 탑인 소공탑 등을 둘러보았다.

사막의 오아시스에 세워졌다가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 왕국들의 폐허를 보면서 인간의 잔인함과 욕심 그리고 한 문화와 인류의 유산이 뭉개져버린 것 같아 안타까웠다.

투루판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이 사막지대에서 어떻게 포도농사를 짓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지 의문을 풀어주는 결정적인 지하 수로를 관람했다.

‘카레스’라 불리는 이 수로는 약 2천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만년설로 덮인 설산(雪山)으로부터 지하에 개울을 파 끌어 온 수로다.

지상으로 개울을 낼 경우엔 물이 이 지역에 오기도 전에 증발할 것이기에 지하로 수로를 내고 이 물로 도시를 이루고 농사를 지었다.

2천년 전의 수로를 현재까지도 사용하는 투루판의 물길을 보면서 인간의 위대함과 무모함과삶을 위한 치열한 자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선조들을 보는 것 같아 뿌듯한 감동이 밀려왔다.

 

사막 불교문화의 백미 돈황(敦惶) 석굴

다음날 선선으로 이동해 쿠무타크 사막을 체험한 후 하미로 이동해 이슬람 회족의 왕과 왕비의 무덤인 17세경의 ‘희왕릉’을 견학한 후 하미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신라 고승 혜초의 발자취가 담긴 돈황으로 출발했다.

하미에서 돈황까지는 사막을 달려 6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나 2차선 도로는 양 방향으로 화물차가 끝없이 밀려 있었고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심지어 고장난 40톤 화물차로 인해 사막 한가운데 도로위에서 꼬박 4시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풀 한포기 없는 사막은 쉴 곳도 없었고 고작 버스에서 내려 버스의 그림자 속에 앉는 것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약간의 구릉이 생긴 곳은 어김없이 화장실로 변했고 남자고 여자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등 돌려서 볼 일들을 봐야했다.

돈황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그러나 사막에서 보는 일몰의 모습은 가슴 저리도록 황홀 했고 사막 한 가운데서 올려다 보이는 별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바람이 불때마다 사막모래가 목덜미를 파고들었지만 북 극성과 별 그리고 흐르는 은하수의 선명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풍경으로 가슴에 각인되어 있다.

16시간 걸려서 돈황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버스에서 랑(회족들의 둥근 빵) 한 조각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호텔에 도착하자 곧장 잠에 취했다.

돈황은 오아시스 도시로서 감숙성에 위치하고 돈황(둔황)이라는 이름은 ‘크게 번성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고비사막의 오아시스로서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이었고 7~8세기 당나라 시대에 동서무역의 중계지로서 세계적인 돈황예술을 꽃 피웠다.

다음 날 본격적인 돈황 여행이 시작 됐다. 모래가 뜨거워지기 전에 사막 체험을 위해 서둘러 명사산(鳴沙山)으로 향했다. 명사산은 바람이 불때마다 모래가 날리며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사산은 그 야말로 밀가루 같이 고운 모래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낙타를 타고 선한 낙타의 눈망울과 터벅터벅 발목을 덮는 모랫길을 묵묵히 걷는 낙타의 착한 심성에 감탄하며 산을 올랐다. 바람이 불때마다 몰아치는 모래 때문에 마스크를 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사막을 체험했다.

사막의 능선과 햇빛을 받아 만들어 내는 음영의 곡선 그리고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사라지는 발자국을 보며 생명 없는 땅의 또 다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사막체험을 하고 인근 오아시스로 수천년 동안 마르지 않고 고이는 월아천(月牙泉)으로 향했다.

초생달 모양으로 사막 한가운데 고여 있는 월아천은 수천년을 두고 생명수가 되었으며 사막에 풀과 나무가 자라게 했다. 멀리 명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월아천은 신비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기이하게도 생각 됐다.

사막체험을 한 후 이번 여행의 목적지인 막고굴(莫高窟)로 향했다. 막고굴은 천불동처럼 사막의 굳은 지형과 절벽에 굴을 뚫고 불상을 모신 곳이다. 천불동이 그림 위주라면 이곳은 불상과 그림이 혼재된 석굴 속의 법당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 막고굴은 서기 366년에 ‘악준’이라는 승려가 명사산과 삼위산에 이상한 빛이 있음을 보고 석벽을 파서 불상을 모신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한다. 그로부터 14세기 이르기까지 약 천년동안 수많은 승려, 조각가, 화가, 석공, 도공, 목공 등이 드나들면서 굴을 파기 시작 해 약 1천개에 이른다.

이곳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신라의 고승 혜초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는데 그것이 발견된 곳이 바로 막고굴의 17번 굴이기 때문이다.

왕오천축국전은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혜초(慧超 : 704~787)가 지은 인도여행기로 1권. 필사본. 총 6,000여 자로 두루마리 형태인데, 일부분만이 현존한다. ‘오천축국으로 여행갔던 기록’이라는 말로, 천축국은 인도이며 오천축은 인도가 넓기 때문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지방으로 구분해 한꺼번에 부른 이름이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 펠리오가 중국 둔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 석굴에서 발견한 문서 속에 포함되어 있어 알려지게 됐다.

돈황 막고굴을 관람하며 시대에따라 변천한 조각과 불상들을 감상하고 드디어 17번 굴에 들어가 혜초의 영혼과 교감했다.

그 먼 옛날 신라로부터 이 척박한 땅을 지나 인도까지 다녀 온 우리의 조상이 있었다니 감개무량했다. 우리의 문화가 오늘날 세계 속에 빛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탐험적 조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됐다.

나는 불교도가 아니지만 17번 굴의 불상을 향해 손을 합장하고 고개숙여 절했다. 1천300년 전 한반도 저 끝에서 목숨을 걸고 사막을 넘어 인도까지의 순례를 한 혜초 승려에 대한 예를 표하는 게 도리라 생각했다.

막고굴 주변은 그저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먼 옛날에는 물이 있는 오아시스였다니 지구 온난화로 인한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맺는 말

우루무치에서 돈황에 이르는 사막 비단길 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영감과 풍부한 서정성을 안겨 주었다. 인간이 꽃 피운 예술과 문화는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김 없이 탄생되었고 불모의 땅에서도 종교가 번창하며 기복을 원했음을 알 수 있었다.

돈황에서 다시 열차를 타고 밤새 10시간을 달려 우루무치로 돌아와 만년설에서 흐른 물이 고여 만든 해발 1990m에 위치한 ‘천지(天池)’를 본 후 인천공항을 향해 전세기를 타고 귀환했다.

이번 여행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상상의 폭을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동서교역의 루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아무리 척박한 환경에서도 인간이 꽃피운 찬란한 문화가 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또한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거대한 비룡의 모습과 그들과 이웃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발전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생각하는 계기도 됐다.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협조해 준 경기신문 가족과 특히 (주)혜인교역 손광성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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