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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몹쓸 병-新春文藝<신춘문예>

 

사람은 가끔 아주 작은 것을 오랫동안 기억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 때에 엮인 환경이나 계절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끝내는 추억으로 남게 된다.

몇 년 전 이맘 때 추억 한 토막, 초로(初老)의 신사가 버스 터미널 신문 가판대에 진열해 놓은 일간지를 골고루 한 부씩 뽑았다.

‘여행시간이 세 시간 남짓한데, 왜 저렇게 많은 신문을 살까?’ 공교롭게도 좌석 번호가 옆자리였다. 부록처럼 붙어있는 마지막 몇 장을 열심히 탐독했다. 신춘문예 시(詩)부문 당선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은 메모를 하는 진지한 모습이 문학 교수 은퇴자로 단정했다.

휴게실에서 커피 한 잔이 말문을 텄다. 한때 문청(文靑)(문학청년)이었다. 15년 신춘문예 투고를 했는데, 줄곧 낙방했다. 나이 칠십을 넘겼지만 해마다 이 맘때면 문학병(病)이 도진다고 했다. 찬바람만 불면 책상머리에서 시를 끄적이곤 한다. 참으로 몹쓸 병이라 했다.

신춘문예에 관해서는 정말로 박식했다. 모르는 것이 없었다. 처음 신춘문예가 시작됐을 때 당선사례는 박사진정(薄謝進呈-아주 작은 돈이나 물품으로 사례)이다. 소설의 경우 1등은 60원, 2등은 30원, 당시 쌀 한가마니가 30원이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신춘문예 투고자가 1만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줄어 8천 명 가량 된다고 하면서 문학의 위기라고 했다. 모든 이 그러하듯 옛날을 회상할 때 홍조를 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비밀스러운 것까지 실토를 했다.

약간 각색을 해서 정리해 본다. 잡지사에서 먼저 통보가 왔다. “평소 좋은 시를 쓰고 있다는 소식 들었다. 이제까지 작품을 보내주시오. 엄격히 심사 후 통보하겠음” 며칠 지나지 않아 “귀하는 000시인에 의해 추천 완료되었음” 사진과 수상소감을 보내 달라고 했다.

멋있는 수상 소감을 위해 정성을 다하느라 죽을 고생했단다. 사진관에 가서 여권사진과는 다른, 책을 들고 측면사진을 수십통 찍었다. 사색하는 표정을 주문하는데 계면쩍더라고 말했다.

어떻게 알고 나에게 작품부탁을 했을까? 좀 이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세속적인욕심- 자녀들과 친지들이 “저사람 사업 하면서 시도 쓰는구나, 멋있구나.” 이런 허영심이 발동되더라나. 조금 지나 책 500권과 함께 편지를 받았는데 형식은 그럴듯했지만, 내용은 청구서였다.

“시인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전문 문예지는 경영이 매우 어렵습니다. 재력이 허락하는 한 한국 시단의 발전을 위해…….”

매우 씁쓸해했는데 추천시인의 경력은 세계 시인 협회 수석 부회장, 학력은 중국 무슨 대학명예박사. 부끄러웠다. 더구나 가관인 것은 당선 축하연이 열린 주석(酒席)이 전혀 비(非)문학적으로 끝나버렸다.

그 뒤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각종문예지에서 원고 청탁이 와서 거절하느라 혼이 났는데 편지 머리에는 대부분 “평소 존경하는 00 시인에게” 낯 뜨거웠지만, 기분이 싫지 않았단다.

손자 손녀들에게 그의 작품이 실린 빛바랜 잡지를 건너면 할아버지를 좀 달리 보는 것 같아 그때의 허영심이 조금 보상받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영광스럽게도 문학하는 사람을 몇 알고 있다. 전업(專業)보다도 일상에서 짬을 내어 작업을 하는 사람이 더 살갑다. 나는 그런 분을 우러러 본다.

이미 대가(大家)가 되어버린 소설가가 고백하기를 “시는 어려워서 소설을 택했다.” 틀림없이 초로의 그 신사분도 올해도 어김없이 가슴앓이를 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맘때는 어김없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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