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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4. 정조대왕

 

이름 산.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조선의 제22대 임금이자 작가, 화가로 불세출의 업적을 남긴 현대 수원의 밑그림을 그린 정조대왕.

수원은 물론 화성, 오산 등 수원권 인근 도시에서 그를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수원 화성과 행궁, 사도세자, 혜경궁 홍씨, 융건릉, 용주사, 채제공, 정약용, 만석거, 탕평책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산재된 그의 흔적과 이름들을 만나면서도 정작 아직도 정조를 잘 알지 못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면서도 사후 20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을 뛰어넘어 곳곳에 배어 있는 위민(爲民)의 향기는 갈수록 팍팍한 인심과 경제난에 하루가 고단한 서민과 중산층이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개혁군주가 꿈꾼 평등한 세상 ‘화성’에 爲民의 향기 스미다

수원하면 그 무엇보다 첫손에 오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을 빼놓고 수원을 얘기할 수 없다는 건 수원이 바로 정조대왕에 의해 재탄생한 도시라는 의미일게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과 정치개혁을 위해, 그리고 은퇴 후 수원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국력을 총동원해 수원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한 정조의 첫 조치는 바로 수원 백성들을 귀히 여기는 것.

수원의 새로운 읍치를 팔달산 기슭으로 옮기면서 행정·치안기관인 관아와 교육기관인 향교, 교통기관인 역참, 상가, 도로, 교량 등 도시 기반시설을 마련하고 민생 대책을 강구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역이 조성된 구 읍치에 살던 백성들에게 넉넉한 보상금과 이사비용을 나눠주는 것도 모자라 수원부 감금 죄수 전원과 수원부 사람으로서 유배중에 있는 이들도 풀어 주고 수원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해주는 등 특별 조치를 베풀었다.

1776년 조선의 제22대 왕위에 오른 정조는 그렇게 애민(愛民)으로 백성을 보듬았다. 즉위와 동시에 왕통을 세워 정체성을 분명히 한 정조는 이후 본격적인 정치에 나선다.

재위 2년째인 1777년 자신이 펼 왕정의 중요 분야를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 ·재용(財用) 등으로 제시했다.

민산을 일으키기 위해 민의 폐막부터 없애야 한다는 신념 아래 즉위 직후 궁방의 법외 납수분을 호조로 돌리고 궁방전의 세납도 궁차징세법을 폐지하고 본읍에서 거두어 호조에 직납하도록 바꾸어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왕실 스스로 모범을 보인 다음에 감사·수령들로 하여금 민은을 살피는 행정을 강화하도록 하는 한편 어사 파견을 자주하여 악법을 잘라내고 무고를 펴도록 하였다. 심지어 지방의 상급 향리들까지 소견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물었다.

민산의 대본인 농업 발전을 위해 여러 차례 생산력 증대에 관한 많은 의견들을 수렴해 보급에 힘썼다.

측우기와 점풍간을 설치해 세정의 합리화를 꾀했고, 진휼을 위해 여러 차례 국고를 출연했다. 1782년엔 천세력을 미리 편찬·간행하게 했고, 도시로 모여든 이농인구가 중소상인으로 자리잡아감에 따라 1791년에 신해통공의 조치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없애 상업활동의 기회를 균등히 했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을 재간행했고, 1781년에 강화도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역대 왕실의 의궤들의 원본을 안치하여 영구보전을 꾀하였다.

정조는 숙종 ·영조의 탕평론을 이어받아 왕정체제를 강화하여 진정한 위민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를 만들었다. 100회 이상을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도 활용하였다.

그는 재위 3년째에 상언(上言) ·격쟁(擊錚)의 제도에 붙어 있던 모든 신분적 차별의 단서들을 철폐하여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해 능행중에 그것들을 접수하도록 하였다.

‘일성록’과 실록에 실린 상언 ·격쟁의 건수만도 5천건을 넘는다.

비단 조선왕조의 역대 왕들의 치적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기자·삼국·고려의 시조 등의 왕릉을 수리하고 수로왕릉과 신라의 제 왕릉에 두루 제사지냈으며, 온조왕묘를 숭열전으로 이름붙이고 고려 4태사묘에 사액하였다.

수원과 수원사람들에 대한 정조의 마음은 각별함 그 자체다.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을 지침서로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수원화성을 완공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정조는 화성유수부와 인근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을 감면해 줬으며 환곡과 군포를 탕감하거나 감축했다. 또 임금 주최의 각종 연회에의 초대를 비롯해 특별과거인 문·무과 별시를 통한 지역 인재 등용 등 각종 특혜와 민생 대책을 시행했다.

행정·군사·상업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춘 수원을 건설하기 위한 정조의 꿈은 국비 6만5천냥이라는 거금을 수원 백성들에게 빌려주면서 공업과 상업을 촉진해 18세기말 수원의 번영을 가져오게 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팔달문 밖의 남시장(현 영동시장)과 북수동의 북시장(일명 성안시장)이 섰다. 당시 북부 보시동(현 북수동)에 형성된 8부자집은 전국에서 이주해 온 상공업자들이 상업활동을 벌인 곳이다. 이때 서민과 소상인들에게 자본금을 대여해줬다고 해서 보시동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의 중심에 수원을 두기 위한 노력은 만석거, 축만제, 만년제 등에서 찾아볼 수 있고, 정조대왕의 유별난 수원사랑은 이후 현재까지 수원을 행정과 군사, 상업, 농업,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자료제공 : 수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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