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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바람직한 페이스메이커란?

 

구정 전야(前夜)-객지에 있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오래 동안 추억이 될 수도 있고 재미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궁리 끝에 극장 단체관람으로 결정했다. 날이 날인만큼, 아무리 끌리더라도 피 튀기는 액션물은 뭣하고 달콤한 애정물은 혹시 노골적인 정사장면이 담겨 있으면 부자지간에 서로가 데면스러울 수도 있고 결국 합의를 본 것은 12세 이상 관람가인 ‘페이스메이커’란 영화였다

한국 일등 배우들인 안성기, 김영민이 시시한 영화에 출연했을까라는 기대하는 구석도 있었다. 솔직히 그 때까지 페이스메이커(Face Maker)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서양 도박사들이 포커 판에서 자기의 패를 감추기 위해 냉정하게 표정을 관리하는 포커페이스(poker face)와 비슷한 의미인 줄 알았다. 하여간 무식함이란!

영화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기 인생을 희생한 퇴물에 가까운 마라톤 선수가 있는데, 치킨 배달을 하면서 생활을 한다. 어느 날 국가 대표 팀 감독이 그를 찾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예상되는 유망한 선수를 위해 훈련용 선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동생을 위해 어린 시절을 희생하고 또 젊은 유망주를 위해 그림자 노릇을 한다. 동생이 가장 적극적으로 말리지만 그는 돈이 필요했다. 또 다시 그림자 인생을 시작한다.

그렇다. 페이스메이커란, 마라톤이나 수영 같은 기록경기에서 우승후보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투입된 선수를 말한다. 마라톤 전구간 42.195㎞ 하지만 페이스메이커는 30㎞로 정도만 필요하다. 이때까지 작전상 속도조절을 해 다른 선수들을 지치게 만들어 놓고 정작 뒤를 따르던 선수에게 자리를 내줘 우승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페이스메이커는 절대 1등을 넘보아서는 안 된다. 분수를 넘어서면 모든 작전이 헝클어져서 엉뚱한 선수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우승 그리고 금메달은 페이스메이커에게 영광이 아니라 독배(毒杯)인 것이다. 메달도 영광도 기대할 수 없는 국가대표! 누군가를 위해! 어느 때까지만! 선두로 달려주어야 한다. 2등을 한 선수, 3등을 한 선수도 모두 우승을 갈망한다.

그런데 우승을 목말라 하고 또 능력도 있지만 출발점에서부터 우승을 포기해야 하는 선수! 메스를 뺏겨 버리고 돌팔이 의사가 하는 수술을 지켜보는 명의(名醫)의 입장은?

챔피언보다 훨씬 강하지만 스파링 선수이기 때문에 연습 때마다 얻어터진다면, 그 사람의 팔자는 참으로 기구한 셈이다. 누구든 페이스메이커의 신분에서 벗어나길 갈망한다. 이 영화에는 형제간의 우애! 책임! 모든 것이 녹아있어 최근 영화 가운데 수작(秀作)이었다.

요즘 대권 후보 여론 조사가 유행이다. 하룻밤 사이에 뒤집혀지기도 하고 각 매체 마다 수치가 다르다 보니 신뢰가 가질 않고 또 관심도 얇아진다. 그런데 어느 정치 평론가라는 분이 현재 2등과 3등이 서로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다가 나중에 한사람이 양보를 하면 필승이란 말을 했다.

아직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스포츠의 가장 미덕이 정정당당함이 아닌가? 그러면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를 내세워 승부를 하는 것은 약간의 꼼수가 아닌가? 그것도 작전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결코 향긋한 냄새는 못 느낀다. 더구나 대통령선거에서 이런 정치공학적인 작전을 쓴다면 이건 아무리 선의로 해석하려해도 말이 안 된다. 훌륭한 페이스메이커란 자기희생이 미덕이란 사실을 그 분이 잠시 간과(看過)한 모양이구나.

/김기한 객원 논설위원·전방송인 예천천문우주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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