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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스현장]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116년 동안이나 벌였던 전쟁이 백년전쟁이다. 당시 ‘칼레’라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가 영국군에게 포위되자, 칼레 시장은 영국군에게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가 영국군에게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시를 대표하는 6명을 처형할 것을 명령한다. 이 때 칼레에서 가장 부자이면서 사업가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Eustache de St Pierre)’가 처형을 자청했다. 그러자 이어 시장, 정치가, 법률가, 학자, 고위 군인 등 5명이 손을 들었다. 이들은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처형되기 직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처한 6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해 살려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이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이야기가 된다. ‘노블레스(Noblesse, 명예) 오블리주(Oblige, 책임)’는 프랑스어로 사전적 의미는 ‘사회 지도층이 갖춰야 할 정신적 도덕적 책임’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은 초기 로마 시대부터 였다고 한다. 당시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도덕적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한니발과 카르타고가 벌인 16년간의 포에니 전쟁 중 전사한 귀족만도 13만에 이르렀다. 이러한 귀족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은 로마가 고대의 맹주로 자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국가가 어렵고 국론이 분열될 때면 국민 통합을 이뤄냈던 것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한 연구소가 자체 개발한 선진화 지표를 통해 OECD국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수준을 측정 비교한 결과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우리 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도는 30개 회원국 중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무리 서구 유럽의 문화라고는 하지만 글로벌화 돼 가고 있는 이 시대에 쓴웃음을 짓게 했다. 매일 접하는 언론의 헤드라인에는 정계, 관계, 재계, 학계를 막론하고 부정 부패에 물든 유명인사들의 얼굴이 도배돼 나온다.

갈수록 우리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회 지도층은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이에 대한 사회 지도층에 대한 비난의 강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만연됐던 때가 있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갑자기 갑부가 된 사람, 권력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얻은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됐다 하더라도 얻고 나면 모두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너도 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억울하면 출세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지 않을 사람은 출세를 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 사회는 혼탁과 타락의 정도가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세계화 물결 속에 있는 우리는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대상이다. 재벌이나 청치인, 고위 관료들에게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요구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 사회는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끌려가는 사회가 아니다. 독선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이 있다면 그 정치인의 책임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정치인으로 뽑은 국민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 어떤 기업인이 부정으로 축재(蓄財)를 하고 세금을 탈루한다면 그것을 견제하지 못한 국민과 언론 그리고 관리감독을 소홀한 공무원들의 책임이 더 큰 것이다.

이 사회를 살고 있는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므로 어떤 한 사람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은 모두의 공동 책임이다. 무능하고 부정직하면서도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자들을 향해 푸념만 할 때가 아니다. 우리 또한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무책임, 무질서, 무원칙의 중병을 앓고 있지 않는지 성찰하고 이 사회를 사는 모든 이들이 노블레스이고 오블리주를 해야 한다는 공감이 필요한 때다.

/김선우경찰청 대변인실 온라인소통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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