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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5. 故 우장춘 육종학자

 

우장춘. 한때 ‘씨없는 수박’의 개발자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종의 합성이론’을 실증해 역사를 뒤바꾼 세계적 육종학자.

서민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팍팍하고, FTA 등으로 전통 먹거리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거린다는 요즘 우장춘의 이름을 회고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국민들의 관심이 오직 춥고 배고픔을 벗어나는 것에 있던 시절부터 반세기가 넘는 동안 묵묵히 그 역할을 수행한 ‘수원’과 ‘수원사람들’.

 

‘200만 수원권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지만 ‘수원’을 세계인에게 가장 많이 각인시키고, 수원 농업과학기술원 내 여기산에 잠든 ‘씨앗의 독립선언’을 외친 ‘수원사람’, 우장춘을 만난다.

1898년 일본 도쿄에서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과 일본인 여성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태어난 우장춘.

5살 무렵 대한제국의 자객에게 ‘조국과 역사의 이름으로’ 심판당한 아버지를 여의고 극심한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인이 아닌 존재로 성장한 우장춘은 그 시절 최고의 명문이라는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1919년 일본 농사시험장에 취업한다.

우장춘은 1922년부터 ‘유전학 잡지’에 ‘종자에 의해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관하여’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였다.

이후 1930년 나팔꽃에 관한 박사학위 제출용 논문이 시험장의 화재로 소실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4년여의 노력 끝에 ‘종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다시 작성·제출하여 1936년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의 학위논문은 세포유전학연구에서 게놈을 분석하고 기존의 식물을 실제로 합성시킨 최초의 사례로 ‘일본 식물학 잡지’에 발표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에도 차별은 계속됐지만, ‘우장춘꽃’이라 불리는 ‘겹꽃 피튜니아’, ‘유채’ 등의 빛나는 연구성과를 과시하면서 육종연구에 몰두했다.

우장춘이 일본인 아닌 한국인으로서의 차별을 감내하며 육종 연구에 매진하던 시절, 끊임없이 조선독립을 외치던 조국은 1945년 자주국임을 만방에 선언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광복 이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던 각종 채소종자 반입이 중단되어 국가적으로 커다란 곤경에 처해 있었다.

 

 

1947년 정부와 전국민이 우장춘 환국추진위원회를 만들고 모금운동을 벌이는등 우장춘 환국추진운동에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1950년 3월 어머니와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에 뼈를 묻을 것을 약속’하며 귀국,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초대소장에 취임해 조국과 농업 재건에 몰두한다.

현실은 참담했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엔 연구시설은 고사하고 잠잘 곳이나 씻을 곳도 변변치 않았다.

그래도 우장춘은 연구에 몰두했다. 일본에 철저하게 종속된 ‘식민농업지’였던 조국에 돌아온 우장춘에겐 가장 중요한 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우장춘이 가장 먼저 시작한 연구사업은 기존 품종으로부터 우량 품종을 찾아내 채소 종자를 우리 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다양한 재래 품종과 외래 품종으로부터 한국 기후와 식성에 맞는 우수한 품종을 얻게 되면서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한다. 1955년 무렵부터는 채소의 종자를 자급자족하는데 성공했다.

우장춘의 노력은 계속된다. 서로 다른 품종들 사이의 교잡 시험을 추진해 우량 일대 잡종의 시대를 열어 배추 원예1호와 2호, 양파 원예1호와 2호, 양배추 동춘 등과 같은 신품종을 잇달아 개발했다. 일대 잡종 배추의 개발은 세계 최초로 일궈낸 성과다. 그리고 이들 신품종은 민간 종묘 회사에 분양되어 종묘산업이 시작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채소 육종 연구만큼은 일찍이 국제 수준에 올라서게 됐고, 국민들은 그토록 지긋지긋한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장춘은 대한민국의 지도와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제주도 곳곳에 넘쳐나는 감귤 역시 우장춘의 작품이다. 일본에서 도입한 귤나무를 실험 재배하고 품종을 개량하면서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 생산지를 구축해 제주 감귤 산업을 일으켰고, 제주를 유채꽃의 섬으로 물들였다.

또 강원도민들의 주식이었으나 툭하면 바이러스에 궤멸하면서 사람들까지 기아로 허덕이게 하던 감자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무병 씨감자를 개발해 강원도를 감자의 특산지로 바꿔 놓았다.

우장춘의 빛나는 업적은 계속됐다. 무·배추 등 채소와 볍씨 품종개량에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후진양성에도 힘써 김종·진정기·김영실, 그리고 원우회의 제자들을 길러내 ‘장춘학파’를 이뤘다.

그러나 우장춘에게 어찌 기쁨만이 있었을까. 그의 조국이 석연치 않은 불가 이유를 고수하면서 우장춘은 어머니의 죽음과 딸의 결혼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장춘은 끝까지 조선인을 위해 마지막 생을 바쳤다.

벼 육종 연구를 자신이 도달할 최종 목표로 정해 놓았던 우장춘은 연구소에 벼를 심어 연구하였고, 한국인이 식량을 자급할 새로운 품종의 벼를 개발할 것이라며 확신에 차 있던 어느날 악화된 건강으로 입원을 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 온지 약 10년만인 1959년, 건국 이래 두번째로 문화포장을 받은 우장춘은 “나는 이제 여한이 없네. 나의 조국이 나를 알아주었어, 그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다”면서 조국의 하늘아래 눈을 감았다.

한국 농업 발전과 한국 종자 독립의 큰 씨앗을 뿌리고 그가 떠난 이후 생활 곳곳에서 만나지는 우장춘의 이름에도 우리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 2010년부터 농업진흥청이 우장춘의 창의적 실용정신 계승과 농업계의 새로운 성장 전환점 창출을 위해 ‘우장춘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가 수원과 대한민국에 뿌린 절대적인 업적에도 수원 그 어디에서도 그를 찾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오는 8월이면 그의 52번째 추도식이 다시 또 수원에서 열린다. 구국의 영웅이자 세계적인 유전학자 우장춘. 이제 그를 기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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