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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시론] 내 머리 속에 있는 배치표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 담임을 맡다 보니 아무래도 진학지도가 문제가 된다. 오늘 온 이 곳은 중소도시에 자리한 제법 진학에 관심이 높은 학교이다. 새 학년 시작에 즈음해 각 학년으로 나눠 워크숍을 진행했다. 나는 2학년 선생님들과 함께 진학지도 방법에 대해 토론을 했다. 젊은 교사들이 다수를 차지해서인지 활기가 넘친다.

워크숍을 마쳤다. 3학년 선생님들과 워크숍을 함께 진행한 김 선생이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이 아이는 고려대 행정학과와 경희대 한의예과 두 군데 합격했어요. 그런데 최종적으로 어디를 가야하나를 고민하고 있었죠. 여러분들 같으면 무어라고 조언할까요?” 고려대 행정학과나 경희대 한의예과나 모두 이름이 높다. 이럴 때 무어라고 조언을 했을까. 당연히 한의예과라고 했을 것이다. 한의예과라는 이름이 주는 그럴싸함에 더 끌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생이나 학부모나 교사 모두 한의예과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런데 똑같은 질문을 부군에게 했다고 한다. “그게 왜 고민이 되지? 행정학과에 된 것을 보면 그 친구는 오랜 시간동안 인문계 쪽 공부를 했을 테고 다만 수능 성적이 잘 나와서 한의예과를 선택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공부를 갑자기 한 순간에 방향을 바꾼 것일 텐데 과연 한의예과가 그 친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마치 무언가 묵직한 것으로 머리를 강하게 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단다. 아니, 나도 그랬다. 가벼운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래도 제법 오랜 시간을 학생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선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전혀 아니다. 유리벽을 높게 쌓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 학부모 심지어 진학지도를 하는 우리 모두가 배치표를 머릿속에 넣고 있었던 거예요.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 지를 놓치며 살았던 것이지요. 머릿속에 배치표를 넣고는 점수로 아이들을 보았던 거지요.”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어떤 꿈을 꾸며 살고 있는지 관심을 갖기보단 어느 대학 무슨 학과 커트라인이 더 높으니 명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분명 이런 고정 틀은 깨야 한다. 그럼에도 내 무의식 속에서는 여전히 배치표라는 망령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는 대학 3학년 때에 입사가 결정이 됐어요.” 이번 주 토요일, 결혼을 하는 제자 녀석이 찾아와 주례를 부탁하며 자기 얘기를 한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연구소에 근무하는 녀석이었다. 고3 반장을 하며 그 때 아이들을 기억 속에서 모두 불러낸다. “그래, 너는 뭔가 독특하기는 했지.” “저 사실 점수가 부족했잖아요. 무얼 믿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는지.” 대학 3학년 때 모의 면접 시간이었단다. 자기소개서를 쓰고 거기 빈 공간에 자기 집으로 찾아갈 수 있도록 약도를 그리라고 했다. 3D형식으로 약도를 그렸다. 그 서류를 마침 그곳에 온 인사담당자가 보았단다. “자네는 무슨 생각으로 약도를 이렇게 그렸지?” “약도란 목적지를 잘 찾을 수 있도록 그리되 간략해야 합니다. 이렇게 목적을 이룰 수 있으면서 간략하게 표현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그렸습니다.” 그때부터 이 친구는 관리대상자가 됐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연구소에 배치됐다고 한다. 이제는 제법 연구소 내에서 자기만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성과를 내는 위치에 있다고 한다.

당시 진학지도를 할 때 우리 아이들에게 기초 학문을 역설했었다. 그리고 고맙게도 그 아이들은 대부분 기초 학문을 다루는 학과로 진학을 했다. 이제는 대학을 졸업하고 모두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반장 녀석이 들려주는 말에도 그런 얘기는 없다. 다만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지,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지를 말한다. 모두들 즐겁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다행이다. 그때는 그래도 배치표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보았던 것 같은데, 몇 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배치표에 사로잡혀 있으니 답답하다. 다시 내 머리 속에 있는 배치표를 던져 버리고 그 자리에 우리 아이들로 채워야겠다.

/김덕년 안산선부고 교사 경기도 진학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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