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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육사를 흠모하면서

 

이육사 뮤지컬을 구경 가던 지난 주말, 날씨가 왜 그리 을씨년스럽던지……. 계절은 봄 깊숙이 발 딛었지만 맨 바람 세게 불어 추풍(秋風)과 다름없었다. 따뜻한 곳에서 정종 한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3시간 가까운 공연을 관람한 후 잠시나마 조국, 광복, 국운(國運) 등 대견스러운 생각을 했다.

본명이 이원록(李源祿)인 시인은 수감번호 64번을 따서 육사를 필명으로 삼았다. 한때 황태자 소리를 듣던 박철언 씨도 출감 후 펴낸 책 제목이 ‘4077, 면회 왔습니다.’ 4077은 수인(囚人)번호. 보통 사람들은 지긋지긋 해서 그 숫자를 버릴 만도 한데……. 전문(全文)을 외우는 시(時)는 거의 없는데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어대다 무릎을 꿇어야하나?] 육사의 절정(絶頂)은 겨우 외우고 있다. 서정적이지만, 웅장한 언어! 시인으로도 매력적이지만 특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시인이 지켜온 ‘일관된 저항의식’이다.

우리는 쉽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말하지만 그런 덕목을 요구받는 당사자 들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경제 인사들이야 자신의 가진 것 일부를 뚝 떼어서 사회 환원이란 듣기 좋은 명분을 내세우면 그럴듯하지만, 지식인들의 도덕적 의무란? 한 마디로 ‘행동하는 지성’이다. 물론 일관성이 중요하다. 어느 분의 정치적 구호 ‘행동하는 양심’과는 별개!

지식인들은 배고픔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어도 사회적인 평판에는 민감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당연하다. 항상 퇴로를 만들어 두는 양시론(兩是論)적 주장을 내세워 ‘용의주도함’으로 비춰지고 후세 사람들에게 결국 변절자로 욕먹는다. 고인들에겐 죄송하지만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의 경우가 이러하다. 민초들은 지도자들의 공칠과삼(功七過三)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이다.

나름대로 소극적인 변명은 있었지만 대세를 꺾을 순 없다. 육사는 퇴계 이황선생의 13대손이다. 아무리 국운이 다했다지만 쉽게 말해 먹고 입고 사는 것은 걱정할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의를 고민하면서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린다. 풍찬 노숙을 자청한다. 댓가성 있는 유혹을 뿌리치고 일관된 삶을 살다 감옥에서 병사한다. 무릇 독립운동의 교과서적인 삶을 사신 어른이다.

육사의 시는 얼핏 보면 서정적, 전원적이지만 행간마다 독립에 대한 염원과 확신이 넘쳤다 꽃이란 시에서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발갛게 피지 않는가?] 불확실한 독립에 대해 용기를 가질 것을 백성들에게 우회적으로 주문한다.

청포도에서도 [내가 바라는 손님이/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아이야 우리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 두렴] 독립의 기쁨을 이렇게 가상한다.

시인은 이래서 위대하다! 하물며 조선혁명군사학교에서 군사훈련까지 마치니! 육사 기념관에 들르면 인상 좋은 할머니 한 분이 다소곳이 잔일을 거든다. 이 옥비 할머니, 육사의 유일한 혈육(血肉)이다. 개인적인 사연이 있는데 생략하기로 하고, 고등 학교시절에 등록금 면제(독립 유공자 자격이 아니고 성적우수자)외에는 나라 덕을 본 것이 없다했다. 이래도 되는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유가(儒家)정신이라 하나 속으로 많이도 울었을 것이다. 그날 밤은 모처럼 숙연했다.

추기: 가까이 지내는 프로듀서가 있는데, 그 친구 연락이 뜸해 처음에는 궁금하다 나중에는 섭섭했다. 한 해 세월 갈 때마다 늘어나는 것이 옹졸함이다. 알고 보니 육사 뮤지컬 제작 때문이었다. 미안해졌다. 수고했다는 덕담과 함께 육사를 결점 없는 영웅을 만들어 신격화 하지는 말도록……. 꽃잎이 떨어지면 바람 탓도 할 수 있거니…….

/김기한 객원 논설위원 前방송인 예천천문우주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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