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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인생] 최고농업기술 명인 임두재 씨

버섯과 함께 해온 삶 행복 아들·며느리 덕분에 달인 됐죠

 

“버섯에 미쳤었습니다! 버섯을 보면 행복하고 살아있는 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배움이 짧아 남보다 더욱 더 노력을 하고 움직여야 했지만, 그래도 버섯과 함께 하는 나는 행복합니다.” 농촌진흥청이 선정하는 ‘2011 대한민국 최고농업기술 명인’ 화훼·특작 분야에서 명인으로 선정된 임두재 씨의 버섯 사랑은 그를 ‘명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대전시 유성구 원신흥동에 위치한 그의 버섯 농장 ‘산들원’에서 임 씨를 만났다.<편집자 주>

임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300만 원이라는 적은 돈을 들고 버섯 농사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려운 경제 형편으로 어릴 적부터 소망하던 목장 운영이란 목표를 잠시 접고 직장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농업인의 꿈’을 접지 않고 있던 중 우연한 기회에 버섯을 접하게 되면서 그의 버섯 사랑은 시작됐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버섯이 영지버섯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술력도 경험도 없던 그에게 첫 버섯 농사는 실패로 끝났다. 좌절도 한 순간 임 대표는 다시 버섯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다음으로 느타리 버섯에 도전했다.

느타리 버섯 작목을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버섯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었던 데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자신의 버섯 재배기술을 쉽게 가르쳐 주지 않는 환경 탓에 어려움은 계속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매일같이 버섯과 함께하며 버섯 연구에 몰입한 결과 버섯 작목은 서서히 빛이 보이게 됐고, 작지만 성공의 단물도 맛을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또다시 위기가 다시 찾아왔다. 그의 느타리 버섯 농장에 세균성갈반병이 찾아 든 것이다. 지금은 이유도 예방법도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때 그에게는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 갑자기 세균성갈반병이 찾아든 겁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죠. 하지만, 제가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기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양송이 작목으로 전환을 했죠. 그리고 저의 성공의 밑거름이 된 아가리쿠스 버섯도 작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임 대표는 다시 한 번 도약을 꿈꾸며 새송이 버섯으로의 작목 변경을 결심하게 된다. “양송이 버섯 납품을 위해 직접 대구까지 배송을 가고 일본으로 아가리쿠스 버섯을 수출하면서 어느 정도의 농장의 안정을 가져왔지만, 여기서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송이 버섯은 지금은 대중화가 되어 있지만, 2000년대 초만하더라도 생소한 버섯종이었다. 그는 자연산 송이가 너무 고가이기에 이와 비슷한 새송이 버섯이 앞으로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과감하게 도전에 나섰다. 새송이 버섯 재배를 위해 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을 받아 새송이 버섯의 종균을 구한 임 대표는 시험재배를 하면서 새송이 버섯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새송이 버섯을 재배하면서 좀더 나은 수익을 위해서는 직접 종균을 배양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새벽 4시면 우량 종균 배양을 위해 농장에 나왔습니다. 그러기를 1년여 드디어 품질 좋은 새송이 버섯을 생산해 낼 수 있었습니다.

자본이 부족했던 임 대표는 하루에도 7천여 병이나 되는 종균 배양병의 뚜겅을 수작업으로 일일이 열얻다 닫았다 하며 좋은 종균 배양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매일같이 7천병이 넘는 종균병의 뚜껑을 수작업으로 열고 닫는 것을 보고 농장을 찾은 사람들은 저를 비웃었습니다. 종균시설의 비용이 너무 크기에 저희 같은 소규모의 농장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하루 만병을 자동화 기계로 생산할 정도로 규모를 확대했지만, 새송이 버섯 작목 초기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죠.”

그 결과 현재는 하루 1만병의 종균병 배양을 하고 있다. 앞으로 하루 3만병의 종균병 배양을 목표로 하고 있는 임 대표는 화려한 기술이나 장비보다는 소규모 농업인들에게 꼭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버섯 재배에서 난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온도를 잘못 조절하면 순식간에 종균들이 패사를 하죠. 한 번에 엄청난 손실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효과적인 난방을 위해 연구를 했습니다.”

문제는 난방장치의 가격이었다. “LPG통을 이용해서 한 번 만들어 보자 생각했죠. 300만 원의 비용이 드는 난방 장치 대신 저렴한 LPG통을 이용한 난방장치를 개발했습니다. 모양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안정성과 효율성을 갖춘 장비입니다.”

끊임없는 연구로 유황버섯도 개발, 현재 특허출원을 준비 중이라는 임 대표는 레미콘을 이용한 배지 생산기도 개발해 다른 농장에 보급하고, 연간 1천 명을 대상으로 버섯에 대한 교육을 제공하는 버섯농장 교육장도 운영 중이다.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주위의 많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저와 같은 농업인으로의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번에 최고농업기술 명인으로 선정되면서 받은 상금 역시 절반은 대전광역시 농촌지도자회에 농촌학생들을 위해 써달라며 전달했고, 반은 버섯연구회의 발전기금으로 전달하는 등 나눔을 실천하고 있었다.

임 대표가 명인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숨은 조력자들의 역할도 한 몫했다. 바로 그의 아들과 며느리이다. 둘 다 농업관련 특수 대학교를 졸업하고 임대표의 경험에 전문적인 지식의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도 농장 일을 함께 할꺼라는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군대를 졸업 후 아들이 함께 하겠다고 하며, 한국농업대학에 입학해 버섯배양에 대한 공부를 하더군요. 고생스러운 일인지 알기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지만,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앞으로 기존의 농장 시스템에 전문적인 경영 시스템을 도입, 농장을 운영하고 싶다는 임 대표는 몇 년 안에 농장을 이전해서 좀더 나은 시설에서 최고 품질의 위생적인 생산시설을 구비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정부의 정책에도 변화가 있었으면 했다.

“우리나라의 소규모 농업인은 아직 힘이 듭니다. 실질적으로 영세한 농업인들의 위한 제도가 좀더 보완이 되고, 여러 규제들로 인해 꿈을 가진 농업인들이 희망을 포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앞으로 값싼 수입 농산물들이 몰려와 우리나라의 농업인들은 더욱 더 어려워 질 것 같은데, 이를 위해 정부의 현실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임 대표도 현재 농장 이전을 위한 부지를 구입했지만, 복잡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제도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위해 임 대표는 정부와 농업인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아울러 후배 농업인들에게는 변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농업이라고 해서 변화가 없으면 안됩니다. 똑같은 버섯일지라도 농장마다 맛과 향이 다릅니다. 변화를 무서워 하지 말고, 배움을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농업인들은 특히 더 공부를 해야합니다. 생산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경제 상황과 유통까지 두루 알고 있어야 실패를 최소화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의 농업에도 큰 변화가 있어야 할 때입니다.”

농장 안에서 버섯을 살펴보는 임 대표의 모습에서 진정한 장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자본과 학벌, 배경이 아닌 끊임 없는 노력이 그를 ‘명인’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런 그에게서 우리 농촌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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