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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수원사람들] 9. 신풍초등학교

‘100여년 수원역사의 산증거’화성행궁 복원사업에 이전 운명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개교 100년이 훌쩍 넘은 수원 최초의 초등학교.

1896년 2월 10일 첫문을 연 이래

지난 2월 103회 졸업식까지

무려 3만명이 넘는 동문을 배출하며

수원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수원발전의 산 증거.

바로 신풍초등학교다.

수원토박이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소풍날만 되면 비가 내리던 그 학교.

미스터 토일렛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과

고 최종건 SK그룹 창업주가

“신풍초등학교 출신임이 자랑스럽다”고

평생을 영예로 여겼다는 전설이 된 학교,

정조대왕의 애민 사상이 이름에서부터

고스란히 베어있는 그 학교를 만난다.
 

 

 

 

 

 


신풍초등학교는 진주중안초등학교(현 진주초교)와 서울효제초등학교에 이어 개교한 전국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초등학교다. 신풍초교는 그 이름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조대왕과 한치도 뗄래야 뗄 수 없는 학교다.

신풍(新豊)은 바로 옆의 화성행궁 정문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화성행궁의 정문은 본래 진남루(鎭南樓)였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명령에 의해 신풍루로 바뀐다.

이런 이름은 중국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한나라를 세운 고조의 예에서 비롯되었는데, 정조 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주변의 수원부를 지금의 팔달산 근처로 옮기면서 한 고조처럼 세금과 군역, 죄인들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베풀면서 신풍이란 이름을 붙였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화성행궁은 이제 전국민뿐만 아니라 세계가 다 알듯이 관아 겸 임금이 머물던 임시 궁궐이었다. 신풍초등학교 자리는 우화관(于華館)이라는 화성유수부의 객사 터다. 1789년 처음 세울 때는 팔달관이었다가 1795년 우화관으로 바꾸었다.

일제는 이렇듯 민족의 역사가 면면히 흘러 애국심과 자부심이 가득했던 민족의 자존심의 상징인 이 객사를 활용하여 1896년 수원군공립소학교를 세웠고 1941년 신풍공립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꾼다.
 

 

 

 


정조대왕의 애민(愛民) 정치와 효(孝) 사상, 실학(實學) 정신까지 한몸에 품은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고 일제의 식민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방편으로 악용한 아픔까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학교다.

신풍초교를 앞세운 일제의 만행은 악랄했다. 아이들이 뛰어놀던 학교운동장마저 화성행궁의 일부였으니 그 파괴 정도가 얼마나 치밀했던지 알 수 있다.

신풍초교는 이후 공립수원보통학교, 수원신풍공립심상소학교, 수원신풍보통학교, 신풍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의 신풍초교란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게 수원과 함께 해온 신풍초교는 지난 1986년 1월 1일 화재로 전소되어 그해 8월 다시 개축되었다가 화성행궁의 본격적인 복원과 함께 현재의 학교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학교의 역사가 116년이나 되었고 3만명이 넘는 동문을 배출했으니 당연히 수원은 물론 대한민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을 수없이 배출한 것도 자연스럽다.

신풍초교 동문들이 첫손 꼽는 ‘자랑스런 신풍인’은 바로 고 심재덕 수원시장.

미스터 토일렛으로 세계화장실협회를 창립하고, 수원천 복개 반대와 수원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지정, 2002월드컵 수원 유치까지 수원 현대사의 한획을 그인 고 심 시장이 대표적인 신풍인이다.

지금은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고 최종건 창업주와 국민 아나운서로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박찬숙 전 국회의원도 동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한류의 원조인 태권도를 미국을 시작으로 가장 먼저 해외에 보급한 ‘무하마드 알리’와 ‘이소룡’의 스승인 ‘준리’ 이준구 대사범도 신풍초등학교 출신이다.
 

 

 

 


유수한 역사의 신풍초교도 역사의 흐름은 어쩔수 없는 것일까.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도시화와 함께 대규모 아파트촌이 곳곳에 형성되고, 도심 공동화가 가속화되면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운영됐던 신풍초교는 학생수가 줄어 이제 한 학년당 한 학급 규모로 명맥을 잇고 있다.

하늘을 찌르던 교세는 많이 위축되었지만 전통음악 대취타 교육과 무예 24기 계승 교육 등 전통문화의 배움터로의 명성은 신풍초교의 존재가치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혼과 역사의 제자리찾기를 위해 당연히 제모습을 찾아야 할 우화관의 이면에 고스란히 옮겨지는 운명을 맞게된 신풍초교. 화성행궁 복원과 함께 광교신도시로의 이전이 결정되면서 동문들의 반발이 심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던 정문앞 비석과 함께 어린 시절 비오는 스산한 날씨면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들을 겁에 질려 집으로 발걸음하게 만들던 신비로운 전설을 간직한 학교.

수원의 새 역사를 시작한 정조대왕이 사후 아들 순조 임금이 지어 그 혼을 기린 사당인 화령전에서 화성행궁을 지켰다는 전설이 스민 우화관 뒤 화령전 고목을 베자 이무기가 나왔고, 그 이무기를 죽였더니 소풍날만 되면 비가 왔다는 그 ‘신풍괴담’도 이제 광교신도시로 옮겨가게 될까.

우화관 복원과 함께 신풍초교의 이전이 거스를 수 없다 해도, 마을 르네상스의 화려한 결실로 인사동을 뛰어넘는 수원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떠오른 ‘화성행궁길’처럼 한켠 그 어디에선가 신풍이란 이름과 흔적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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